[이데일리 장영락 기자] 1910년 10월 7일 일제는 강제 병합한 조선 권력층들에게도 서구 흉내를 낸 귀족 작위를 수여했다. 이 가운데는 이완용 등 오늘날도 이름을 남긴 매국노들이 여럿 포함됐다.
 | | 1931년 일왕에 인사하는 '기원절 배하식'에 참석한 사이코 마코토 조선총독과 조선귀족들. 위키미디어 |
|
1910년 8월 9일 대한제국과 일제 사이 한일병합조약이 성립하며 34년의 긴 식민지 강점이 시작됐다. 일제가 대한제국 멸망 이후 병합에 협조한 대한제국 기득권들에게 포상을 하는 일은 식민지 통치 안정성 확보 차원에서도 필요한 일이었다.
이에 따라 일왕이 ‘조선귀족령’이라는 칙령을 발표해 논공행상을 실시하고 작위도 수여하게 된다. 9월 1일에는 순종 황제가 이왕, 고종이 이태왕, 황태자가 왕세자로 책봉되고 황족인 이강과 이희는 공작 작위를 받았다.
10월 7일에는 병합에 공을 세웠다는 명목으로 77명이 귀족 지위를 받았다. 후작 6명, 백작 3명, 자작 22명, 남작 46명의 귀족이 나왔고, 이들이 일왕한테 받은 은사금도 모두 600만원에 달했다. 망하기 직전인 1909년 대한제국 예산 5000만원의 10%가 넘는 큰돈이었다.
일제는 식민통치의 유용한 ‘마름’들을 위해서 은사금 뿐만 아니라 조선귀족세습재산령을 공포해 이들이 세습 재산도 보호받을 수 있도록 했다. 조선 귀족들 스스로도 조합회를 만들어 조선총독부가 마음대로 수용한 임야와 삼림들을 무상대부, 불하받았다.
귀족의 이름값이 이보다 땅에 떨어진 때가 없다고 할만했지만, ‘나라 팔아먹은 공’을 부끄러워한 이가 없는 것 아니었다. 8명이 작위 수여를 거부했고, 3명은 이후 독립운동으로 실작했다.
그럼에도 정부 요인, 고위 관료들이었던 이들 대부분은 기꺼이 일제가 하사하는 지위와 재산을 받아들고 식민지 대중이 수탈로 고통받는 동안 호의호식했고, 자손들까지 오래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일제가 패망한지 80년이 넘고 친일재산환수법이 만들어진지는 20년이나 됐지만 여전히 환수하지 못한 재산이 1000억이 넘어가가는 사정을 보면, 나라가 망하든 말든 내 앞길만 챙긴 그들은 ‘옳은 선택’을 한건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