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대상 이 작품]단 한명의 관객을 위한 공연… 무뎌진 감각을 깨우다

-심사위원 리뷰
송주원 안무 '바스락'
관객이 안전조끼·MR 쓰고 입장
가상·현실공간 중첩되며 자아 성찰
  • 등록 2025-02-18 오전 6:00:00

    수정 2025-02-18 오후 1:40:58

[정옥희 무용비평가] 서울 용산구 보광동의 작은 중식당 이태원 불꽃. 손님들조차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곳에선 한 달째 혼합현실(MR) 공연을 진행했다. 식당 영업을 하지 않는 낮과 휴무일인 수요일에 식당 집기들을 치우고 단 한 명의 관객을 위한 1시간짜리 공연을 한 것. 횟수는 무려 60회가 넘었다. 경제 논리로는 성립하지 않는 공연의 지향점은 무엇일까.

(사진=오석근)
송주원 안무가의 ‘바스락’(2024년 11월 23일~12월 11일)은 그가 천착해 온 보광동 탐구를 집대성한 작품이다. 10여 년 전 극장에서 벗어나 보광동 골목을 누비는 춤 영상을 만들며 그는 도심 속 사라지는 공간과 존재에 대해, 그리고 극장이 강요하는 고정된 시선과 분열된 감각에 대해 성찰했다. 보광동을 걷고 느끼면서 쌓아올린 탐구가 ‘바스락’의 두터운 켜를 형성했다.

관객이 대기 공간에서 안전 조끼와 MR기기를 착용하고 입장하면 퍼포먼스를 시작한다. 익숙한 시공간에서 벗어나야 탐험이 시작되듯 검푸른 물결과 파도소리가 감각을 리셋한다. 파도가 잦아들면 뭉게구름 속에서 무무가 등장한다. 이곳에선 안무가 자신인 퍼포머가 무무, 관객이 무휼로 호명된다. 무휼은 무무의 안내에 따라 미지 공간을 탐색한다.

(사진=오석근)
공연은 어두운 객석에서 꼼짝하지 않고 관람해야 하는 극장과 달리, 6개로 구획된 공간을 걷는 경로로 구성됐다. 공간이 텅 빈 무대로 주어지는 게 아니라 무휼이 걷고 만지고 개입하면서 구성된다. 능동적인 관람이라 해서 무한정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무휼은 무무가 꼼꼼하게 계산한 이동 경로와 태스크(과제), 가상현실(VR)과 증강현실(AR)을 오가는 테두리 안에서 움직인다는 점에서 ‘유도된 안무’라 할 수 있다. 무무와 무휼은 서로에게 협조하며 공모 관계를 이룬다.

(사진=오석근)
하지만 MR 기기를 쓴 무휼은 저시력자와 마찬가지라 무무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 평상시의 감각, 특히 시각이 무력화된 상황에서 무무는 나머지 감각들을 예민하게 세워야 한다. 더듬더듬 나아가지만 여의치 않다. 5㎝ 남짓한 단차가 놀이기구 마냥 무섭다. 이 정도에 감각계가 뒤흔들릴 정도이니 인간의 감각이란 얼마나 허술한가.

가상 공간과 실재 공간이 중첩되며 감각과 공간을 확장하고, 재현과 현존의 이분법을 무효화시킨다. VR에선 보광동에서 길어 올린 삶이 펼쳐진다. 쇠락한 골목과 버려진 오브제가 아포칼립스 풍경을 암시한다면 아랑곳없이 살아가는 새와 고양이, 깻잎, 개미가 휴먼 스케일 너머의 공간을 이룬다. 삶의 흔적이 배어있는 실내풍경 위로 건조한 목소리로 읊는 법정주소는 장소와 공간의 격차를 지시한다.

(사진=오석근)
‘바스락’은 MR을 활용한 공연이지만 MR 예술이 범하기 쉬운 시각중심성에 빠지지 않고 무뎌진 감각을 뒤흔드는 극장적 장치로 활용한다. 무휼은 주사위를 집어 들고 카레와 정향 냄새를 맡고 벽을 만지고 오브제를 들어 올린다. 무무의 어깨에 손을 얹고 걷고 함께 보이차를 마신다. 시각이 유예된 상황에서 몸과 몸, 몸과 공간이 만나며 몸의 물성적 감각이 깨어난다. 무무의 어깨에서 전달되던 리듬과 따뜻함, MR 기기를 쓴 채 찻잔에 입을 댈 때 느껴지던 유격이 내게 강렬히 새겨졌다. 공연장에선 모두가 하나된다고 하지만, 존재와 존재가 잠시나마 제대로 만나기 위해 송주원은 단 한 명의 관객을 초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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