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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이런 일도 있었다. 장교로 군 복무 중이던 1970년대 중반, 대구 동성로의 유명한 음악다방 ‘목마’에서의 미팅 자리. 당시 파트너가 제법 마음에 들어 “우리 다음에 다시 한번 만나죠”라며 애프터 신청을 했다. 그랬더니 상대방 대답이 “언지예”. “내일모레 보죠”라고 신나서 말을 이었는데 상대방은 또 “어디예”란다. “여기 이 목마다방에서 만나시죠”라고 대답하고는 하숙집으로 돌아왔다. 이틀 후 목마다방엔 나 혼자뿐이었다. 이 에피소드를 들은 하숙집 아주머니는 ‘언지예, 어디예 모두 노(No)라는 뜻’이라며 한참을 웃었다.
이 좁은 국토 안에서도 지역과 시대, 생활환경에 따라 언어는 달라진다. 삼촌이라는 호칭도 제주에서는 남녀를 가리지 않고 두루 쓰이는 높임말이다. 내 기준으로 남의 말이 이해되지 않는다고 화부터 낼 게 아니라 어떤 맥락과 환경에서 그런 말이 나왔는지를 따져봐야 오해가 생기지 않는다.
요즘 상대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해 발생하는 사회적 혼란과 다툼이 너무 많다. 특히 반말에 대한 기성세대와 젊은이들 간의 이해 차이는 그 골이 무척 깊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 반말은 ‘대화하는 사람의 관계가 분명치 아니하거나 매우 친밀할 때 쓰는, 높이지도 낮추지도 아니하는 말’, ‘손아랫사람에게 하듯 낮추어 하는 말’이라는 두 가지 뜻으로 정의하고 있다. 그 어디에도 반말이 비하와 멸시의 뜻을 내포하는 게 아님에도 젊은이들은 나이 많은 사람이 반말하면 당신이 뭔데 반말이냐며 쌍심지를 돋운다. 화자 간의 엄격한 위계와 서열을 전제로 이뤄지는 한국어가 상호 간의 원활한 소통을 가로막고 권위주의적인 관계를 강화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작금의 국가적 위기 사태에서 나타난 국민 간의 인식과 상대를 바라보고 이해하는 간극은 도저히 한 나라에서 하나의 언어로 살아간다는 것에 심각한 위화감을 갖게 만들고 있다. 똑같은 현상을 인식하는 뇌 구조에 진짜 문제들이 없는 것일까. 아니면 뉴스 제작자의 지나친 편견과 편향이 모두를 잘못 이끌고 있는 것일까.
유튜브만 보는 사람은 기성 언론이 광화문 집회 인파를 제대로 알리지 않는다고 하고 기성 언론은 유튜브에 돈벌이에만 혈안이 된 가짜뉴스가 판친다고 한다. 태극기집회 참가자의 언어와 레거시 미디어에 종사하는 기자의 언어가 다르다 보니 이제는 서로를 이해하려 하지 않고 무시하거나 척결해야 할 대상으로 보기에 이르렀다.
요즘 미국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언론 관계 지형은 진화 중이다. 비전통적 매체인 ‘인플루언서’, ‘팟캐스트’, ‘크리에이터’ 등의 뉴미디어 언론인들에게도 백악관 기자실을 열어주는 등 다양한 정보 유통 채널을 인정하고 그 문호를 개방한다고 한다. 뉴스 언론과 정보 전달 체계의 역할이 변하고 있는 것이다.
웅변과 선동은 민중을 오도(誤導)하고 무대와 가면 뒤에 숨은 자들의 욕망을 채워줄 뿐이다.
반말을 둘러싼 관점의 차이를 이해하지 않으면 노인과 청년이 서로를 백안시하게 되는 것처럼 광장과 데스크의 관점의 차이를 이해하지 않으면 이 사회는 불신과 증오의 땅이 되고 말 것이다. 누가 맞느냐 틀리느냐를 넘어 서로의 언어를 알아보려 하고 이해하려는 흐름이 절실하다. 결국 국가의 앞날에 미치는 효용과 해악이 선택되기 때문이다.
전라도 꼬마 아이의 ‘자네’를 이해했을 때, 대구 아가씨의 ‘언지예’를 이해했을 때 터져 나왔던 파안대소가 그리운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