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홍수현 기자] 2021년 3월 26일, 피부 질환이 있는 딸에게 “아빠가 옮아서 치료약을 찾아주겠다”며 성폭행하고 카메라를 설치해 사생활을 감시하는 등의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50대 아빠에 징역 13년이 확정됐다.아빠는 얼토당토 않는 이유를 대며 친딸을 계속 성폭행했다. (사진=챗gpt)아빠 A씨는 2018년 11월부터 2019년 2월까지 딸 B(22)씨를 수차례 성폭행하고 강제추행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A씨는 피부 질환이 있는 B씨에게 “네가 병원에 가면 사람 취급하지 않을 것. 아빠가 옮아서 치료 약을 찾아주겠다”는 황당한 이유를 들어 성관계를 요구했다. 또 “용한 무당이 너와 내가 2세대 전에 끔찍이 사랑한 연인 관계였다고 하더라”라는 말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B씨의 완강한 거부에도 A씨는 자해를 하며 위협하거나 힘으로 제압해 성폭행한 것으로 조사됐다. 그 외에도 B씨의 자취방에 카메라를 설치해 사생활을 훔쳐보고, 연락이 닿지 않으면 딸의 휴대전화에 미리 설치한 위치추적 애플리케이션을 이용해 행방을 찾기도 했다.1심 재판부는 B씨의 피해 진술이 일관된 점과 A씨가 B씨에게 성행위를 노골적으로 요구하는 통화 녹취록 등을 근거로 A씨의 유죄를 인정해 징역 13년을 선고했다.B씨는 재판 과정에서 탄원서와 처벌 불원서를 제출했으나 재판부가 신빙성을 인정하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았다.아버지 A씨가 범행에 대해 반성하지 않고 딸을 회유하는 시도만 계속하는 상황에 비추어 볼 때 딸의 처벌불원 의사를 진심으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다.재판부는 B씨의 처벌 불원서에 대해 “A씨의 부재로 경제적 어려움을 호소했던 B씨 모친 증언 태도 등에 비춰 A씨의 처벌로 가정에 경제적 어려움이 발생한 것으로 인한 고립감과 죄책감을 이기지 못했기 때문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다만 “여타의 성폭력 사건과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 죄질이 불량하다”면서도 재범 위험성이 크다고 단정하기 어렵다며 전자발찌 부착 청구는 기각했다.또 미성년자일 때도 A씨로부터 강제 추행을 당했다는 B씨 측의 주장에 대해서는 피해 시기 등에 대한 진술이 일관되지 않았다며 무죄를 선고했다.아버지는 범행을 부인하며 딸을 회유하려 들었다. (사진=챗gpt)항소심 재판에서 A씨 측은 딸 B씨가 모친에게 피해 사실을 털어놨다가 “모두 거짓말이었다”고 부인한 점 등을 들어 무죄를 주장했다.이에 딸 B씨는 재판 과정에서 모친에게 거짓말이라고 한 것은 A씨의 강요에 따른 ‘거짓말’이었다며 맞섰다.항소심 재판부는 “‘마땅히 그런 반응을 보여야만 하는 피해자’로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진술의 신빙성을 배척할 수 없다”며 A씨 측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친족 간 성폭행이라는 범행의 특성상 피해자가 가족 등 주변의 회유에 흔들릴 수 있다는 특수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취지다.“제가 피해자인 것은 맞는데, 제 기억이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제가 잘하면 다시 평범한 가족처럼 돌아갈 수 있을까 생각을 했다” 등 그동안의 B씨 진술을 볼 때 재판부는 모친에게 거짓말을 한 B씨의 행동이 충분히 납득할 만하다고 봤다.2심 재판부는 1심 판단 대부분을 그대로 인정했지만, A씨가 과거 성범죄 전과가 있다는 점 등을 들어 20년간 위치추적 전자장치 부착도 함께 명령했다.A씨 측은 상고했지만 대법원은 상고를 기각해 원심의 형 13년이 확정됐다.
공포탄 발포 부른 축구 열기..마지막 경평전
장영락 기자2025.03.25
[이데일리 장영락 기자] 79년전인 1946년 3월 25일 서울 경성운동장(동대문운동장)에서 마지막 경평대항축구전이 열렸다. 해방 후 처음 열린 경평전이었던 터라 경기가 과열돼 관중 난동까지 발생했는데, 축구팬들이 국내 리그는 물론 해외축구도 열성적으로 챙겨보는 요즘 문화는 나름 전통이 있었던 셈이다. 1946년 3월 25일 경평전 기념촬영 사진. 서울역사편찬원 자료.경평전은 1929년 조선중앙일보 사장이던 정치인 여운형이 서울과 평양의 도시 대항 축구 경기를 구상한 끝에 처음 열렸다. 분단 전인 당시만 해도 서울과 평양은 각각 제1, 제2의 도시로 모두 황해권에 자리해 멀지 않은 도시였던 터라 지역 라이벌 의식이 강했다.여기에 일제 핍박으로 대규모 스포츠 이벤트가 거의 없던 시절이다보니 경평전은 1935년까지 계속되면서 서울, 평양시민 뿐만 아니라 전국적인 관심 속에 치러졌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독재 정부가 스포츠를 사람들의 정치적 무관심을 유도하기 위한 수단으로 썼던 사례와 달리, 식민지에서 열린 도시 대항전은 오히려 피지배 대중들의 공동체 정체성을 강화하는 계기가 됐다.당시에는 팀이 아니라 군(軍)이라는 표현을 썼기 때문에 경평전은 경성군과 평양군 대결로 진행됐다. 양팀은 대체로 스포츠 활동 기반이 있던 대학 선수들이 주축이 되었고 분단 이후에 경성군과 평양군 자체가 남북한 국가대표팀의 모태가 되기도 했다.경평전은 축구에 대한 관심도 불러일으켜 전국에서 선수들이 몰려들었고, 경평전 자체는 중단됐으나 1938년에는 서울, 평양, 함흥 3도시 대항전, 서울을 중심으로 10개 팀이 참여한 전조선도시대항축구대회 등이 대형 스포츠 이벤트의 흐름을 이어갔다. 그러나 전쟁에 몰두하던 일제가 1942년 강제동원을 위해 조선 전역에서 구기종목대회를 금지해버리면서 경평전은 해방 후에야 다시 경기를 치를 수 있게 됐다.북한 정부가 들어서기 전인 1946년 3월 25일 후일 동대문운동장으로 개칭 후 지금은 철거된 경성운동장에서 해방 후 처음이자 마지막 경평전이 열렸다.이틀 동안 대회가 열렸는데, 경기에 대한 관심이 뜨거워 만원 관중이 된 것은 물론 흥분한 팬들이 난동을 일으켜 경찰이 공포탄을 발포해 이들을 해산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당초 치러질 예정이던 3차전은 당연히 취소됐다.축구에서 벌어진 감정싸움은 분단 체제 하 정부 수립을 두고 갑론을박이 벌어지던 당시의 정치적 혼란상도 어느 정도 반영한다. 이 갈등은 관중 난동과는 비교도 안될 전쟁이라는 비극으로 비화됐고, 그렇게 경평전은 예전 기록에서나 찾아볼 과거로만 남게 됐다.
4세 여아 의붓딸 암매장 계부…그가 흘린 '눈물'의 의미
김민정 기자2025.03.24
[이데일리 김민정 기자] 2016년 3월 24일, 숨진 네 살배기 의붓딸을 암매장한 계부 안모(38) 씨가 경찰에 붙잡힌 지 엿새 만에 돌연 ‘눈물’을 보였다.안씨는 2011년 12월 25일 오전 2시께 숨진 의붓딸인 안승아(4)양의 시신을 부인 한모(36) 씨와 함께 진천군 백곡면 야산에 암매장했다.안양은 나흘 전인 같은 달 21일 친모인 한씨가 대소변을 가리지 못한다며 물을 받아 놓은 욕조에 머리를 3∼4차례 집어넣어 숨진 뒤 집 베란다에 방치돼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안양은 한씨가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였다. 살해 당시 한씨는 안씨의 딸을 임신한 상태였던 것으로 알려졌다.(사진=연합뉴스)이런 사실은 2016년 3월 17일 3년째 미취학 아동이 있다는 학교 측의 연락을 받은 동주민센터 직원이 안씨의 변명을 수상히 여겨 경찰에 신고하면서 드러났다.한씨는 경찰 수사가 시작되자 18일 오후 9시 50분께 자신의 집에서 “아이가 잘못된 것은 모두 내 책임”이라는 내용을 유서를 남기고 번개탄을 피워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같은 날 긴급체포된 안씨는 경찰에 붙잡힐 것을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내내 침착하고 담담했다. 4차 진술조사까지는 거의 ‘예’와 ‘아니오’ 식으로 단답형 대답만 하며 냉정한 모습을 유지했다. 프로파일러 조사 때는 여유 있게 미소를 지어 보이기도 했다.안씨는 암매장 안양 시신 발굴 현장에서는 “왜 제대로 못 파느냐”고 독려, 경찰을 당황하게 하기도 했다.그토록 ‘무쇠 멘탈’의 소유자로 보이던 그는 한씨 유서와 일기를 접한 뒤에는 수사에 협조적으로 자세를 고쳤다. 시종 부인하거나 마지못해 시인했던 안양 폭행 사실도 비교적 상세하게 털어놨다. 한씨의 일기장에는 유서와 보육원에 있던 친딸 안양을 집에 데려온 뒤 벌어진 집안 내 갈등 상황이 소상히 기록돼 있었다. 또 뒤늦은 용서를 구하며 안씨 사이에서 태어난 네 살배기 막내딸이 행복하게 살게 해달라는 당부도 들어 있었다.비록 불화가 잦았다고는 하지만 인생의 반려자였던 아내 한씨의 절절한 표현은 경찰 조사에서 시종 냉정함과 침착함을 유지하던 안씨의 감정을 자극한 듯했다.다만 안씨의 이같은 눈물이 한집안의 ‘풍상’을 가장으로서 다스리지 못한 죄책감에 흘린 뒤 늦은 참회의 눈물인지 아니면 자신에게 쏟아지는 국민적 비난을 모면하기 위한 위선의 눈물인지는 알 수 없다.(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무엇보다 안씨가 틀림없는 시신 유기 장소라고 지목해 16곳이나 파헤친 진천 야산에서 안양 시신을 찾아내지 못했다. 대규모 인력과 굴삭기 등 장비, 경찰 탐지견과 지표면 투과 레이더까지 동원했지만 소용없었다.결국 ‘시신 없는 암매장사건’이 되면서 안씨가 재판과정에서 진술을 번복할 가능성이 우려됐지만 안씨는 범행사실을 모두 인정했다. 검찰은 “이 사건은 친모가 딸을 살해하고, 호적상 아버지인 피고인이 사체를 야산에 암매장한 패륜적 범죄”라며 “피고인이 평소 부인과 아이를 지속해서 폭행·학대한 점을 고려하면 그 죄질이 극히 불량해 엄벌이 필요하다”고 지적하면서 안씨에게 징역 7년을 구형했다.1심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은 안씨는 항소심에서 원심보다 높은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재판부는 “피고인은 부인의 학대 행위를 말리지 않고 의심을 피하고자 함께 동조해 피해자를 수차례 폭행하는 등 학대했다”며 “딸이 사망에 이르게 된 책임이 피고인에게 있다고 보기 어렵지만, 진실을 숨기려 한 점은 죄질이 가볍지 않다”고 설명했다.이어 “피고인은 피해자가 사망한 뒤 부인을 수차례 폭행하고 친딸도 폭행했다”며 “비록 피고인이 뒤늦게 범행을 인정하고 반성하고 있는 점 등을 고려하더라도 1심의 형량은 가볍다”고 밝혔다.이후 대법원이 안씨의 상고를 기각하면서 형이 확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