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콘텐츠부

김영환

기자

그해 오늘

  • "짐승보다 위험하다"…은혜를 칼로 갚은 살인범[그해 오늘]
    [이데일리 한광범 기자] 2005년 9월 28일 오후 2시. 서울 서초동 대법원 2호 법정. 대법원 3부 심리 사건에 대해 재판장인 양승태 대법관(이후 대법원장)이 피고인의 상고를 기각하고 원심의 사형 판결을 그대로 확정했다.대법원은 “범행에 대해 진정으로 참회하는 빛을 보이지 않고 있어 처벌을 통한 교화 가능성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피고인에 대해 사형의 선고가 정당화될 수 있다”고 판시했다. 피고인은 수십 년 동안 자신을 뒷바라지해준 은인인 대학교수 A씨를 참혹하게 살해한 ‘마산 교수 살인사건’ 범인 전용술(당시 만 49세)이다. 은혜를 원수로 갚은 전용술에 대해 법원은 “맹수보다도 위험하다”고 질타하기도 했다.자신의 은인이던 대학 교수를 참혹하게 살해한 전용술.전용술은 이미 10대 시절 사형 판결을 받았던 적이 있다.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전용술은 고등학교 1학년 재학 중이던 1972년 당시 여자친구 B씨의 부모가 교제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이들을 폭행했다. 폭행 사건으로 학교에서 퇴학당한 전용술은 재판에 넘겨져 징역 장기 8월, 단기 6월 판결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그리고 출소 후 폭행 사건으로 B씨가 자신을 떠났다는 이유로 1974년 7월 출근 중이던 B씨에게 흉기를 마구 휘둘러 숨지게 했다. 그리고 도주 중 택시를 상대로 강도 짓을 한 후 현금을 빼앗았고 이후 경찰의 추격을 받자 인질극을 벌이다 인질에게 흉기를 휘두르기도 했다. 전용술은 검거 후 재판에 넘겨져 1·2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대법원은 1975년 4월 “범행이 미성년자의 미숙한 정서와 사려에서 비롯된 점을 참작해야 한다”며 무기징역으로 감형했다.◇모범수로 감형→사회복귀하자 본색 전용술의 초등학교·고등학교 2년 선배로서 어린 시절부터 친하게 지냈던 A씨는 무기수로 수감 중이던 전용술의 옥바라지를 누구보다 열심히 했다. A씨는 자주 면회를 가거나 서신을 보내는 등 전용술을 살뜰히 챙겼다. 이 같은 옥바라지는 A씨가 청와대 경호실에 근무할 때와 대학교수가 된 후에도 계속됐다. A씨가 이 같이 물심양면의 도운 덕분에 전용술은 모범수가 됐고, 1993년 3월 징역 20년으로 감형됐다. 그리고 같은 해 5월 가석방 돼 다시 바깥세상으로 나오게 됐다.전용술은 출소 후 부모로부터 상속받은 8000만원을 이용해 돈을 벌면서 1995년 1월 결혼해 자녀까지 출산했다. 하지만 1998년 3월 이혼 후 주식투자 등으로 전 재산을 탕진했다. 자살을 고민하던 전용술은 A씨의 만류로 이 같은 뜻을 접었다. 택시기사로 근근이 돈을 벌던 전용술은 이때부터 주변 사람들에게 손을 벌리기 시작했다. 용돈 명목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돈을 받던 전용술은 2000년 12월 A씨에게 “1000만~2000만원을 주면 경제적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도와달라”고 부탁했다.하지만 A씨는 “경제적으로 어렵다”며 전용술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이때부터 전용술은 A씨에 대한 앙심을 품기 시작했다. 그는 주변에 “나한테 큰 도움을 준 것처럼 소문이 났지만 정작 A씨에게 도움 받은 것은 별로 없다”고 말하고 다녔다. 그리고 A씨를 죽이겠다며 수년 동안 칼을 가지고 다녔다. 전용술은 마치 돈을 맡겨놓은 듯이 A씨에게 수시로 전화를 걸어서 돈을 달라고 했다. 이후 2004년 7월 길거리에서 만난 A씨가 “왜 새벽에 수시로 전화를 하느냐”고 꾸짖자, A씨의 단골 술집을 찾아가 술을 마시고 있던 A씨에게 재차 “돈을 달라”고 요구했다. A씨가 “내게 돈 맡겨 놓았느냐”고 반문하자, 전용술은 A씨를 잔혹하게 살해하고 도망갔다.◇뻔뻔하게 ‘피해자 탓’ 반복…책 출간 시도도 전용술은 이후 도피를 위해 며칠 후 진주에서 택시기사를 죽이고 차량과 금품을 빼앗기 위해 택시기사에게 흉기를 휘둘렀다. 피해를 당한 택시기사는 수차례 흉기에 맞아 중상을 입었으나 가까스로 목숨은 구할 수 있었다. 전용술은 이후 8월 5일 주민 신고를 받고 충돌한 경찰에게 검거됐다. 검거 당시에도 A씨와 택시기사 C씨를 공격할 때 사용한 흉기를 소지하고 있었다.전용술은 검거 이후에도 수사기관이나 재판에서 어떠한 반성의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피해자 탓을 하며 뻔뻔한 태도로 일관했다. 그는 “A씨가 신의와 진실을 무너뜨려 자존심을 상하게 해 응징했다”며 “별것 아니었던 제 요구를 거부해 스스로 원치 않는 길을 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해선 “A씨가 초래한 일로 구속돼 고통의 나락에서 헤매고 있다”는 황당한 주장을 펴기도 했다.1심 법원은 “눈앞의 작은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의 생명, 신체를 물건보다도 소홀하게 취급하는 지극히 반문명적 행동을 30년 세월을 뛰어넘어 반복했다”며 “맹수보다도 위험한 인물인 피고인을 또다시 세상에 나오게 하는 어리석음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며 사형을 선고했다.재판부는 “살해 동기가 너무나 이기적이고 파렴치해 어떠한 참작할 만한 사정이 엿보이지 않는다”며 “범행 수법은 지극히 잔혹하고 문명세계에 어울리지 않아 피고인의 범죄적 악성을 드러내고 있다”고 질타했다. 전용술은 판결에 불복해 항소·상고했으나 대법원은 1심의 사형 판결을 그대로 확정했다.전용술의 만행은 사형 판결 이후에도 그치지 않았다. 전용술은 2011년 9월 자신의 두 차례 살인 경험을 기록한 책을 출간하겠다며 수감 중이던 교정기관에 자신의 글을 출판사에 보내달라고 요구했다. 소설 형식이었지만 기존에 수사기관과 법정에서 범행을 정당화한 자신의 주장을 되풀이한 글이었다. 전용술은 교정기관이 요구를 거부하자 소송을 제기했다가 패소했다.
    한광범 기자 2022.09.28
    [이데일리 한광범 기자] 2005년 9월 28일 오후 2시. 서울 서초동 대법원 2호 법정. 대법원 3부 심리 사건에 대해 재판장인 양승태 대법관(이후 대법원장)이 피고인의 상고를 기각하고 원심의 사형 판결을 그대로 확정했다.대법원은 “범행에 대해 진정으로 참회하는 빛을 보이지 않고 있어 처벌을 통한 교화 가능성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피고인에 대해 사형의 선고가 정당화될 수 있다”고 판시했다. 피고인은 수십 년 동안 자신을 뒷바라지해준 은인인 대학교수 A씨를 참혹하게 살해한 ‘마산 교수 살인사건’ 범인 전용술(당시 만 49세)이다. 은혜를 원수로 갚은 전용술에 대해 법원은 “맹수보다도 위험하다”고 질타하기도 했다.자신의 은인이던 대학 교수를 참혹하게 살해한 전용술.전용술은 이미 10대 시절 사형 판결을 받았던 적이 있다.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전용술은 고등학교 1학년 재학 중이던 1972년 당시 여자친구 B씨의 부모가 교제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이들을 폭행했다. 폭행 사건으로 학교에서 퇴학당한 전용술은 재판에 넘겨져 징역 장기 8월, 단기 6월 판결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그리고 출소 후 폭행 사건으로 B씨가 자신을 떠났다는 이유로 1974년 7월 출근 중이던 B씨에게 흉기를 마구 휘둘러 숨지게 했다. 그리고 도주 중 택시를 상대로 강도 짓을 한 후 현금을 빼앗았고 이후 경찰의 추격을 받자 인질극을 벌이다 인질에게 흉기를 휘두르기도 했다. 전용술은 검거 후 재판에 넘겨져 1·2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대법원은 1975년 4월 “범행이 미성년자의 미숙한 정서와 사려에서 비롯된 점을 참작해야 한다”며 무기징역으로 감형했다.◇모범수로 감형→사회복귀하자 본색 전용술의 초등학교·고등학교 2년 선배로서 어린 시절부터 친하게 지냈던 A씨는 무기수로 수감 중이던 전용술의 옥바라지를 누구보다 열심히 했다. A씨는 자주 면회를 가거나 서신을 보내는 등 전용술을 살뜰히 챙겼다. 이 같은 옥바라지는 A씨가 청와대 경호실에 근무할 때와 대학교수가 된 후에도 계속됐다. A씨가 이 같이 물심양면의 도운 덕분에 전용술은 모범수가 됐고, 1993년 3월 징역 20년으로 감형됐다. 그리고 같은 해 5월 가석방 돼 다시 바깥세상으로 나오게 됐다.전용술은 출소 후 부모로부터 상속받은 8000만원을 이용해 돈을 벌면서 1995년 1월 결혼해 자녀까지 출산했다. 하지만 1998년 3월 이혼 후 주식투자 등으로 전 재산을 탕진했다. 자살을 고민하던 전용술은 A씨의 만류로 이 같은 뜻을 접었다. 택시기사로 근근이 돈을 벌던 전용술은 이때부터 주변 사람들에게 손을 벌리기 시작했다. 용돈 명목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돈을 받던 전용술은 2000년 12월 A씨에게 “1000만~2000만원을 주면 경제적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도와달라”고 부탁했다.하지만 A씨는 “경제적으로 어렵다”며 전용술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이때부터 전용술은 A씨에 대한 앙심을 품기 시작했다. 그는 주변에 “나한테 큰 도움을 준 것처럼 소문이 났지만 정작 A씨에게 도움 받은 것은 별로 없다”고 말하고 다녔다. 그리고 A씨를 죽이겠다며 수년 동안 칼을 가지고 다녔다. 전용술은 마치 돈을 맡겨놓은 듯이 A씨에게 수시로 전화를 걸어서 돈을 달라고 했다. 이후 2004년 7월 길거리에서 만난 A씨가 “왜 새벽에 수시로 전화를 하느냐”고 꾸짖자, A씨의 단골 술집을 찾아가 술을 마시고 있던 A씨에게 재차 “돈을 달라”고 요구했다. A씨가 “내게 돈 맡겨 놓았느냐”고 반문하자, 전용술은 A씨를 잔혹하게 살해하고 도망갔다.◇뻔뻔하게 ‘피해자 탓’ 반복…책 출간 시도도 전용술은 이후 도피를 위해 며칠 후 진주에서 택시기사를 죽이고 차량과 금품을 빼앗기 위해 택시기사에게 흉기를 휘둘렀다. 피해를 당한 택시기사는 수차례 흉기에 맞아 중상을 입었으나 가까스로 목숨은 구할 수 있었다. 전용술은 이후 8월 5일 주민 신고를 받고 충돌한 경찰에게 검거됐다. 검거 당시에도 A씨와 택시기사 C씨를 공격할 때 사용한 흉기를 소지하고 있었다.전용술은 검거 이후에도 수사기관이나 재판에서 어떠한 반성의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피해자 탓을 하며 뻔뻔한 태도로 일관했다. 그는 “A씨가 신의와 진실을 무너뜨려 자존심을 상하게 해 응징했다”며 “별것 아니었던 제 요구를 거부해 스스로 원치 않는 길을 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해선 “A씨가 초래한 일로 구속돼 고통의 나락에서 헤매고 있다”는 황당한 주장을 펴기도 했다.1심 법원은 “눈앞의 작은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의 생명, 신체를 물건보다도 소홀하게 취급하는 지극히 반문명적 행동을 30년 세월을 뛰어넘어 반복했다”며 “맹수보다도 위험한 인물인 피고인을 또다시 세상에 나오게 하는 어리석음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며 사형을 선고했다.재판부는 “살해 동기가 너무나 이기적이고 파렴치해 어떠한 참작할 만한 사정이 엿보이지 않는다”며 “범행 수법은 지극히 잔혹하고 문명세계에 어울리지 않아 피고인의 범죄적 악성을 드러내고 있다”고 질타했다. 전용술은 판결에 불복해 항소·상고했으나 대법원은 1심의 사형 판결을 그대로 확정했다.전용술의 만행은 사형 판결 이후에도 그치지 않았다. 전용술은 2011년 9월 자신의 두 차례 살인 경험을 기록한 책을 출간하겠다며 수감 중이던 교정기관에 자신의 글을 출판사에 보내달라고 요구했다. 소설 형식이었지만 기존에 수사기관과 법정에서 범행을 정당화한 자신의 주장을 되풀이한 글이었다. 전용술은 교정기관이 요구를 거부하자 소송을 제기했다가 패소했다.
  • 탈냉전 첫걸음…노태우, 韓대통령으로 첫 中방문[그해 오늘]
    [이데일리 김영환 기자] 1992년 9월27일. 노태우 당시 대통령을 실은 공군 1호기가 베이징 서우두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건립된 이후 43년 만에 처음 한국인이 입국하는 순간이었다. 베이징의 상징인 톈안먼(천안문·天安門) 광장에 태극기가 내걸려 있는 모습은 냉전 시대 종식의 상징적 장면이었다.지난 1992년 9월 중국을 방문한 노태우 대통령이 베이징 인민대회당 복건청에서 양상곤 중국 국가 주석과 한·중 정상회담을 가졌다.(사진=e영상역사관)1980~1990년대 들어 동북아의 정세는 요동쳤다. 노 대통령의 3박 4일간 중국 공식 방문은 양상쿤(양상곤·楊尙昆) 중국 국가주석의 초청을 받은 것으로, 한국의 국가원수로서는 처음이었다. 냉전의 시대, 한국과 중국은 서로 적성국가로 분류하던 사이였다.노 대통령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1988년 2월 25일 취임사에서 ‘북방외교’를 본격적인 정부의 대외정책 기조로 설정했다. 취임사를 바탕으로 노 대통령은 같은 해 7월 7일에는 이른바 7·7선언을 발표했고 북방 대륙국들과의 관계 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7·7선언은 남북한 자유왕래 및 북한과 서방, 남한과 사회주의권의 관계개선 협력 등을 주요 내용으로 담고 있다. 노태우 정부는 냉전체제의 해체와 발맞춰 1980년대 말 공산권 국가들과 적극적 외교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북한 역시 북방외교의 구상에 담아냈다.그 일환으로 한국과 중국은 8월 24일 정식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대만과 단교를 하면서까지 중국과의 관계 개선에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노 대통령은 이에 그치지 않고 양국의 발전적 관계를 상징하는 징표로 중국을 방문해 정상회담을 하기에 이르렀다.이는 북한과 대만을 압박하고자 했던 우리와 중국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것이기도 했다. 중국과 소비에트 연방 등에 부속돼 체제를 유지해오던 북한에 압박을 줄 수 있는 카드였다. 중국 역시 대만의 외교적 고립을 강화하려는 노림수를 갖고 있었다.개혁·개방 정책 이후 빠르게 경제 성장을 보이던 중국과, 13억 인구의 새로운 시장이 열린 한국은 경제적 측면에서 급속도로 빠르게 밀착했다. 1992년 64억 달러(약 9조원)이던 대중 교역은 2021년 3015억 달러(431조)를 넘어서 47배 가까이 규모가 커졌다. 지난해 중국은 우리나라의 1위 교역 대상국(24%)이었다.
    김영환 기자 2022.09.27
    [이데일리 김영환 기자] 1992년 9월27일. 노태우 당시 대통령을 실은 공군 1호기가 베이징 서우두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건립된 이후 43년 만에 처음 한국인이 입국하는 순간이었다. 베이징의 상징인 톈안먼(천안문·天安門) 광장에 태극기가 내걸려 있는 모습은 냉전 시대 종식의 상징적 장면이었다.지난 1992년 9월 중국을 방문한 노태우 대통령이 베이징 인민대회당 복건청에서 양상곤 중국 국가 주석과 한·중 정상회담을 가졌다.(사진=e영상역사관)1980~1990년대 들어 동북아의 정세는 요동쳤다. 노 대통령의 3박 4일간 중국 공식 방문은 양상쿤(양상곤·楊尙昆) 중국 국가주석의 초청을 받은 것으로, 한국의 국가원수로서는 처음이었다. 냉전의 시대, 한국과 중국은 서로 적성국가로 분류하던 사이였다.노 대통령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1988년 2월 25일 취임사에서 ‘북방외교’를 본격적인 정부의 대외정책 기조로 설정했다. 취임사를 바탕으로 노 대통령은 같은 해 7월 7일에는 이른바 7·7선언을 발표했고 북방 대륙국들과의 관계 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7·7선언은 남북한 자유왕래 및 북한과 서방, 남한과 사회주의권의 관계개선 협력 등을 주요 내용으로 담고 있다. 노태우 정부는 냉전체제의 해체와 발맞춰 1980년대 말 공산권 국가들과 적극적 외교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북한 역시 북방외교의 구상에 담아냈다.그 일환으로 한국과 중국은 8월 24일 정식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대만과 단교를 하면서까지 중국과의 관계 개선에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노 대통령은 이에 그치지 않고 양국의 발전적 관계를 상징하는 징표로 중국을 방문해 정상회담을 하기에 이르렀다.이는 북한과 대만을 압박하고자 했던 우리와 중국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것이기도 했다. 중국과 소비에트 연방 등에 부속돼 체제를 유지해오던 북한에 압박을 줄 수 있는 카드였다. 중국 역시 대만의 외교적 고립을 강화하려는 노림수를 갖고 있었다.개혁·개방 정책 이후 빠르게 경제 성장을 보이던 중국과, 13억 인구의 새로운 시장이 열린 한국은 경제적 측면에서 급속도로 빠르게 밀착했다. 1992년 64억 달러(약 9조원)이던 대중 교역은 2021년 3015억 달러(431조)를 넘어서 47배 가까이 규모가 커졌다. 지난해 중국은 우리나라의 1위 교역 대상국(24%)이었다.
  • 갑자기 날아온 軍탄알에 스무살 아들을 잃었다[그해 오늘]
    [이데일리 한광범 기자] 2017년 9월 26일 오후 4시 10분. 강원도 철원 육군 제6보병사단 소속으로 동료 대원들과 진지공사를 하고 하산하던 이모 일병(당시 만 20세, 이후 상병 추서)이 갑자기 쓰러졌다.이 일병은 어디선가 날아온 총알에 안면을 직격으로 맞았다. 곧바로 인근의 군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이 일병은 같은 날 오후 5시 22분 숨졌다. 학수고대하던 휴가를 불과 10여 일 앞둔 상황이었다.사건 발생 지점에서 불과 400m 지점엔 사격장이 위치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사건 초기엔 이 일병이 도비탄(튕겨져 나온 탄알)을 맞은 것이란 추정이 나왔다. 하지만 탄알이 찌그러져 있어야 하는 도비탄과 달리 이 일병을 숨지게 한 탄알은 엑스레이 상으로 깨끗했다. 유족은 육군의 추정에 강하게 반발했다. 송영무 국방부 장관의 지시로 국방부 조사본부가 조사에 들어갔다.사고 발생 13일 후인 2017년 10월 9일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유족의 예상대로 이 일병에게 날아온 총알은 도비탄이 아닌 유탄(빗나간 탄알)이었다. 단순 사고가 아닌 안전불감증이 일으킨 참사였다.부대원들이 이동하던 통행로는 사격장의 사로 뒤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에 있었고,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쌓아 두는 사격장의 흙 언덕은 다른 곳에 비해 낮았다. 애초 총구가 조금만 빗나가도 사고의 위험성이 있는 구조였다.더구나 이 일병이 동료들과 함께 부대로 복귀하던 중에는 사격 중임에도 통해로 통제가 되지 않았다. 당시 이 일병 등 부대원들을 인솔할 간부는 사격음이 들리고 있음에도 그대로 통행로로 부대원들을 이끌고 갔다.이동로에 경계병이 배치돼 있었지만 통제 임무에 대해 간부들에게 제대로 지시받지 못했다. 결국 이 일병 부대원들이 지나갔지만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국방부 조사본부는 사건의 책임을 물어 사격주통제관이었던 중대장 A씨, 이 일병 일행을 인솔한 소대장 B씨, 부소대장 C씨를 재판에 넘겼다. 보통군사법원은 2018년 6월 A씨에게 금고 1년에 집행유예 2년, B씨와 C씨에겐 각각 벌금 500만원을 선고했다. 형은 그대로 확정됐다.군인권센터는 사건과 관련해 “사건 책임을 일선 부대 초급 간부들에게 전가해 본질을 호도하려는 정황이 포착되고 있다”고 우려했다. 실제 윗선은 법적 처벌을 피해 갔다.
    한광범 기자 2022.09.26
    [이데일리 한광범 기자] 2017년 9월 26일 오후 4시 10분. 강원도 철원 육군 제6보병사단 소속으로 동료 대원들과 진지공사를 하고 하산하던 이모 일병(당시 만 20세, 이후 상병 추서)이 갑자기 쓰러졌다.이 일병은 어디선가 날아온 총알에 안면을 직격으로 맞았다. 곧바로 인근의 군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이 일병은 같은 날 오후 5시 22분 숨졌다. 학수고대하던 휴가를 불과 10여 일 앞둔 상황이었다.사건 발생 지점에서 불과 400m 지점엔 사격장이 위치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사건 초기엔 이 일병이 도비탄(튕겨져 나온 탄알)을 맞은 것이란 추정이 나왔다. 하지만 탄알이 찌그러져 있어야 하는 도비탄과 달리 이 일병을 숨지게 한 탄알은 엑스레이 상으로 깨끗했다. 유족은 육군의 추정에 강하게 반발했다. 송영무 국방부 장관의 지시로 국방부 조사본부가 조사에 들어갔다.사고 발생 13일 후인 2017년 10월 9일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유족의 예상대로 이 일병에게 날아온 총알은 도비탄이 아닌 유탄(빗나간 탄알)이었다. 단순 사고가 아닌 안전불감증이 일으킨 참사였다.부대원들이 이동하던 통행로는 사격장의 사로 뒤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에 있었고,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쌓아 두는 사격장의 흙 언덕은 다른 곳에 비해 낮았다. 애초 총구가 조금만 빗나가도 사고의 위험성이 있는 구조였다.더구나 이 일병이 동료들과 함께 부대로 복귀하던 중에는 사격 중임에도 통해로 통제가 되지 않았다. 당시 이 일병 등 부대원들을 인솔할 간부는 사격음이 들리고 있음에도 그대로 통행로로 부대원들을 이끌고 갔다.이동로에 경계병이 배치돼 있었지만 통제 임무에 대해 간부들에게 제대로 지시받지 못했다. 결국 이 일병 부대원들이 지나갔지만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국방부 조사본부는 사건의 책임을 물어 사격주통제관이었던 중대장 A씨, 이 일병 일행을 인솔한 소대장 B씨, 부소대장 C씨를 재판에 넘겼다. 보통군사법원은 2018년 6월 A씨에게 금고 1년에 집행유예 2년, B씨와 C씨에겐 각각 벌금 500만원을 선고했다. 형은 그대로 확정됐다.군인권센터는 사건과 관련해 “사건 책임을 일선 부대 초급 간부들에게 전가해 본질을 호도하려는 정황이 포착되고 있다”고 우려했다. 실제 윗선은 법적 처벌을 피해 갔다.
  • 호의 베풀던 70대 노인…실체는 악마였다[그해 오늘]
    [이데일리 한광범 기자] 2007년 9월 25일. 추석 당일 오후 3시 36분. 30대 남성 A씨는 모르는 번호로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저희 아까 전화기 빌려드린 사람인데요. 배 타다가 갇힌 거 같아요. 경찰보트 좀 불러주세요.”해당 번호는 당일 오전 A씨 아내가 휴대전화를 빌려 자신에게 전화를 걸었던 번호였다. A씨 부부는 즉각 경찰에 신고했다. 그리고 “경찰에 신고했어요. 납치인가요”라고 답문 메시지를 보냈다. 하지만 추가 답장은 오지 않았다.신고를 받은 경찰은 발신번호를 추적했다. 20대 중반 직장인 B씨의 휴대전화 번호였다. B씨는 추석 연휴를 맞아 친구 C씨와 함께 전남 보성에 여행을 온 상태였다.◇범행 직후 태연하게 일상생활…의심받자 큰소리 치기도경찰은 즉각 수사에 나섰고, B씨와 C씨가 당일 오전 보성의 한 선착장에서 어선을 탔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경찰은 B씨 등이 탔던 것으로 추정되는 배의 주인을 찾아 나섰다.1938년생, 당시 만 69세의 오종근이었다. 부인과의 사이에서 7명의 자식을 두고 있던 고령의 노인을 범인으로 쉽게 의심하긴 힘들었다. 2007년 4명을 잔혹하게 살해한 보성 어부 살인사건 범인 오종근. (사진=YTN뉴스 갈무리)경찰이 오종근의 가족에게 연락을 했고, 오종근이 어장에 있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경찰의 연락을 받고 보성에 거주 중인 오종근의 딸과 사위가 배를 타고 어장으로 왔다. 오종근은 어장에서 태연하게 주꾸미 채취 작업을 마무리하고 어구를 정리하던 중이었다.당시 선착장에선 20대 여성 2명의 실종 소식이 퍼진 상태였다. 다른 어민들도 오종근을 의심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종근은 뻔뻔했다. 선착장 부근 평상에 있던 주민들에게 먼저 다가가 “내가 칠십 먹었다. 여자 2명을 어떻게 데리고 가겠나”고 큰소리를 치고 집으로 돌아갔다.경찰은 선착장에 도착한 오종근의 선박에 대한 감식을 시작했다. 그리고 선박 내부에서 피해자들의 신용카드 및 볼펜, 머리끈, 머리카락 등을 발견했다. 경찰은 다음날 오종근을 긴급체포했다.◇피해자들 문자·카메라·신고 등으로 범행 밝혀져체포 직후에도 오종근은 여성들을 태운 사실은 인정했지만 살인 혐의는 강력 부인했다. 오종근은 “여성 한 명이 볼일을 보기 위해 이동하던 중 실족해 바다에 빠졌고 다른 여성도 이를 잡으려다 같이 바다에 빠졌다”고 주장했다.그러던 중 피해자 중 한 명의 사체가 26일 아침 발견됐다. 사체엔 목졸림 흔적과 함께 온몸에 멍과 철과상이 있었다. 경찰의 추궁이 계속되자 오종근은 결국 여성들의 살해사실을 인정했다. 다른 피해자의 사체는 28일 발견됐다.오종근은 피해자들에게 호의를 베푸는 척 배에 태운 후 바다 한가운데로 이동해 성추행을 시도했다. 여성들이 격렬하게 반항하자 이들을 힘으로 제압해 바다에 빠뜨렸다. 70세에 가까운 나이였지만 평생 바닷일을 해온 오종근은 당시 기계장비 없이 어업을 할 정도로 힘이 강했다. 바다에 빠진 여성이 살기 위해 배 위에 오르려 하자 오종근은 배 위에서 여성에게 갈고리채를 휘둘러 숨지게 했다.보성 어부 살인 사건 범인 오종근이 체포 직후 자신의 배에서 현장검증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자백을 받은 경찰은 이 사건 발생 전 9월 초 바다에서 시신으로 발견된 남녀 대학생 D씨와 E씨(모두 당시 만 19세) 사건에 대해서도 오종근 관련성을 수사했다. 하지만 오종근은 혐의를 완강히 부인했다. 증거 확보에 나선 경찰은 사망한 여대생이 실종 무렵인 8월 31일 저녁 시간대에 119에 건 4차례 전화에서 오종근의 목소리가 녹음된 것을 확인했다. 또 다른 어망에 피해자들 중 한 명 것으로 보이는 디지털 카메라가 걸려 올라왔다. 복원된 메모리카드에선 배 위에서의 오종근 모습이 선명하게 담겼다.◇“팔자가 그렇다”·“피해자 운이 없었다”…반성은 없다경찰 조사 결과 오종근은 두 번째 범행 25일 전인 8월 31일 오후 선착장에서 D씨 일행을 배에 태웠다. 두 번째 범행 수법과 동일하게 바다 한가운데서 일행 중 여성을 성추행하려는 목적이었다.70세 노인인 자신이 10대 남성을 힘으로 제압하기 힘들다고 판단한 오종근은 기습적으로 남성 D씨를 바다에 빠뜨렸다. 두 사람이 나란히 바다를 바라보고 있을 때 몰래 뒤로 다가가 민 것이다. 피해 남성이 배에 오르려 하자 갈고리채를 휘둘러 숨지게 했다. 이후 남겨진 여성이 저항하자 바다에 빠뜨려 또다시 갈고리채를 휘둘렀다.오종근은 첫 범행 이후에도 두 번째 범행과 마찬가지로 태연하게 일상생활을 했다. 그는 잔혹한 살인을 저지른 이후에도 태연히 선착장으로 돌아와 아무렇지 않게 생활을 하다 2차 범행을 저지른 것이다. 체포 이후에도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범행 동기를 묻는 수사관들의 질문에 “팔자가 그렇다”, “피해자들이 운이 없었고 불쌍하다”, “서로 죽이고 죽으라는 팔자로 태어났나 보다” 등의 뻔뻔한 답변을 계속했다. 1심은 “무려 4명의 젊디 젊은 피해자들이 극도의 공포와 분노 속에 고귀한 생명을 잃었지만, 진솔한 참회나 피해회복을 외면한 채 책임을 피해자에게 전가하고 있다”며 개선 교화의 가능성을 찾는 것은 쉽지 않다“며 사형을 선고했다. 수사기관에서 범행을 자백했던 오종근은 1심 판결 후 또다시 살인 일체를 부인하며 항소했다. 2심은 ”진솔한 참회나 최소한의 피해회복도 외면한 채 허무맹랑한 변명만 무책임하게 늘어놓아 피해자들과 유족들에게 더 큰 상처를 안겨주고 있다“며 ”개전의 정이나 개선 교화의 가능성을 찾기 어렵다“며 1심의 사형 판결을 유지했다. 대법원도 2010년 6월 사형 판결을 확정했다. 현재 만 84세인 오종근은 여전히 광주교도소에서 사형수 신분으로 복역 중이다.
    한광범 기자 2022.09.25
    [이데일리 한광범 기자] 2007년 9월 25일. 추석 당일 오후 3시 36분. 30대 남성 A씨는 모르는 번호로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저희 아까 전화기 빌려드린 사람인데요. 배 타다가 갇힌 거 같아요. 경찰보트 좀 불러주세요.”해당 번호는 당일 오전 A씨 아내가 휴대전화를 빌려 자신에게 전화를 걸었던 번호였다. A씨 부부는 즉각 경찰에 신고했다. 그리고 “경찰에 신고했어요. 납치인가요”라고 답문 메시지를 보냈다. 하지만 추가 답장은 오지 않았다.신고를 받은 경찰은 발신번호를 추적했다. 20대 중반 직장인 B씨의 휴대전화 번호였다. B씨는 추석 연휴를 맞아 친구 C씨와 함께 전남 보성에 여행을 온 상태였다.◇범행 직후 태연하게 일상생활…의심받자 큰소리 치기도경찰은 즉각 수사에 나섰고, B씨와 C씨가 당일 오전 보성의 한 선착장에서 어선을 탔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경찰은 B씨 등이 탔던 것으로 추정되는 배의 주인을 찾아 나섰다.1938년생, 당시 만 69세의 오종근이었다. 부인과의 사이에서 7명의 자식을 두고 있던 고령의 노인을 범인으로 쉽게 의심하긴 힘들었다. 2007년 4명을 잔혹하게 살해한 보성 어부 살인사건 범인 오종근. (사진=YTN뉴스 갈무리)경찰이 오종근의 가족에게 연락을 했고, 오종근이 어장에 있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경찰의 연락을 받고 보성에 거주 중인 오종근의 딸과 사위가 배를 타고 어장으로 왔다. 오종근은 어장에서 태연하게 주꾸미 채취 작업을 마무리하고 어구를 정리하던 중이었다.당시 선착장에선 20대 여성 2명의 실종 소식이 퍼진 상태였다. 다른 어민들도 오종근을 의심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종근은 뻔뻔했다. 선착장 부근 평상에 있던 주민들에게 먼저 다가가 “내가 칠십 먹었다. 여자 2명을 어떻게 데리고 가겠나”고 큰소리를 치고 집으로 돌아갔다.경찰은 선착장에 도착한 오종근의 선박에 대한 감식을 시작했다. 그리고 선박 내부에서 피해자들의 신용카드 및 볼펜, 머리끈, 머리카락 등을 발견했다. 경찰은 다음날 오종근을 긴급체포했다.◇피해자들 문자·카메라·신고 등으로 범행 밝혀져체포 직후에도 오종근은 여성들을 태운 사실은 인정했지만 살인 혐의는 강력 부인했다. 오종근은 “여성 한 명이 볼일을 보기 위해 이동하던 중 실족해 바다에 빠졌고 다른 여성도 이를 잡으려다 같이 바다에 빠졌다”고 주장했다.그러던 중 피해자 중 한 명의 사체가 26일 아침 발견됐다. 사체엔 목졸림 흔적과 함께 온몸에 멍과 철과상이 있었다. 경찰의 추궁이 계속되자 오종근은 결국 여성들의 살해사실을 인정했다. 다른 피해자의 사체는 28일 발견됐다.오종근은 피해자들에게 호의를 베푸는 척 배에 태운 후 바다 한가운데로 이동해 성추행을 시도했다. 여성들이 격렬하게 반항하자 이들을 힘으로 제압해 바다에 빠뜨렸다. 70세에 가까운 나이였지만 평생 바닷일을 해온 오종근은 당시 기계장비 없이 어업을 할 정도로 힘이 강했다. 바다에 빠진 여성이 살기 위해 배 위에 오르려 하자 오종근은 배 위에서 여성에게 갈고리채를 휘둘러 숨지게 했다.보성 어부 살인 사건 범인 오종근이 체포 직후 자신의 배에서 현장검증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자백을 받은 경찰은 이 사건 발생 전 9월 초 바다에서 시신으로 발견된 남녀 대학생 D씨와 E씨(모두 당시 만 19세) 사건에 대해서도 오종근 관련성을 수사했다. 하지만 오종근은 혐의를 완강히 부인했다. 증거 확보에 나선 경찰은 사망한 여대생이 실종 무렵인 8월 31일 저녁 시간대에 119에 건 4차례 전화에서 오종근의 목소리가 녹음된 것을 확인했다. 또 다른 어망에 피해자들 중 한 명 것으로 보이는 디지털 카메라가 걸려 올라왔다. 복원된 메모리카드에선 배 위에서의 오종근 모습이 선명하게 담겼다.◇“팔자가 그렇다”·“피해자 운이 없었다”…반성은 없다경찰 조사 결과 오종근은 두 번째 범행 25일 전인 8월 31일 오후 선착장에서 D씨 일행을 배에 태웠다. 두 번째 범행 수법과 동일하게 바다 한가운데서 일행 중 여성을 성추행하려는 목적이었다.70세 노인인 자신이 10대 남성을 힘으로 제압하기 힘들다고 판단한 오종근은 기습적으로 남성 D씨를 바다에 빠뜨렸다. 두 사람이 나란히 바다를 바라보고 있을 때 몰래 뒤로 다가가 민 것이다. 피해 남성이 배에 오르려 하자 갈고리채를 휘둘러 숨지게 했다. 이후 남겨진 여성이 저항하자 바다에 빠뜨려 또다시 갈고리채를 휘둘렀다.오종근은 첫 범행 이후에도 두 번째 범행과 마찬가지로 태연하게 일상생활을 했다. 그는 잔혹한 살인을 저지른 이후에도 태연히 선착장으로 돌아와 아무렇지 않게 생활을 하다 2차 범행을 저지른 것이다. 체포 이후에도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범행 동기를 묻는 수사관들의 질문에 “팔자가 그렇다”, “피해자들이 운이 없었고 불쌍하다”, “서로 죽이고 죽으라는 팔자로 태어났나 보다” 등의 뻔뻔한 답변을 계속했다. 1심은 “무려 4명의 젊디 젊은 피해자들이 극도의 공포와 분노 속에 고귀한 생명을 잃었지만, 진솔한 참회나 피해회복을 외면한 채 책임을 피해자에게 전가하고 있다”며 개선 교화의 가능성을 찾는 것은 쉽지 않다“며 사형을 선고했다. 수사기관에서 범행을 자백했던 오종근은 1심 판결 후 또다시 살인 일체를 부인하며 항소했다. 2심은 ”진솔한 참회나 최소한의 피해회복도 외면한 채 허무맹랑한 변명만 무책임하게 늘어놓아 피해자들과 유족들에게 더 큰 상처를 안겨주고 있다“며 ”개전의 정이나 개선 교화의 가능성을 찾기 어렵다“며 1심의 사형 판결을 유지했다. 대법원도 2010년 6월 사형 판결을 확정했다. 현재 만 84세인 오종근은 여전히 광주교도소에서 사형수 신분으로 복역 중이다.
  • 대낮 도심서 무장간첩이 시민들에게 총을 쐈다[그해 오늘]
    [이데일리 한광범 기자] 1984년 9월 24일. 오후 1시 30분께 대구의 한 식당에서 주인 전갑숙(당시 29세)씨와 여종업원 강모(당시 18세)씨가 총을 맞고 쓰러진 채 발견됐다. 외출했다 돌아온 가정부 박모씨가 경찰에 신고했고, 총상을 입은 두 사람은 급하게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결국 사망했다.그리고 25분 후 인근의 한 미용실에서 총성이 울렸다. 미용실 주인 A씨는 세 발의 총을 맞고 쓰러졌다. A씨의 비명을 듣고 인근 제화점 주인 김모씨가 급하게 달려왔다.1984년 9월 25일자 경향신문 기사김씨는 A씨에게 총을 쏜 20대로 보이는 장발의 남성과 마주했다. 해당 남성은 총기를 김씨에게 겨누고 위협했다. 그리고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목을 졸리던 김씨는 해당 남성을 발로 차 넘어뜨렸다.그리고 현장에 달려온 다른 주민 2명이 합세해 이 남성을 제압했다. 제압당한 남성은 곧바로 소지품으로 갖고 있던 알약을 먹었다. 청산가리였다. 이 남성은 곧바로 숨졌다.도심 한복판에서 발생한 총기 난사 사건에 수사기관도 경악했다. 수사기관은 숨진 남성의 신원 파악에 나섰지만 어떠한 기록도 찾을 수 없었다. 범행에 사용한 총기는 벨기에제 브로닝 6·35구경 권총이었다. 당시 북한 대남 공작원들이 사용하던 총기였다. 총기엔 소음기가 달려있었다. 범인은 북한이 보낸 무장간첩이었던 것이다. 죽은 무장간첩은 검거 시 자살을 위해 청산가리와 함께 허리띠 버클에 자폭용 폭탄을 가지고 있었다. 또 간첩들이 사용하는 통신기기 등을 비롯해 대남 공작에 사용할 물품만 40여 점이었다. 대공기관은 이 간첩이 대남 테러공작 임무를 갖고 남한에 침투했다고 판단했다. 침투 시기와 루트는 사건이 있기 며칠 전인 9월 18~20일 사이 남해안으로 추정했다. 피해자 중 한 명인 식당 종업원 10대 강씨를 포섭하려 했으나, 강씨가 간첩 신분을 눈치채고 신고하려 했거나 자수를 권유했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식당 주인 전씨가 살해 장면을 목격하자 이를 죽였고, 자신의 얼굴을 본 적이 있는 A씨도 살해하려 했다는 추정이었다.1984년 9월 27일 동아일보 기사3개월 전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전씨는 사망 당시 10개월 된 아들을 두고 있었다. 아들은 결국 할머니 임춘자씨 손에 키워졌다.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웠던 임씨는 정부에 보상을 탄원해봤지만 아무런 경제적 지원도 받을 수 없었다. 엄혹했던 시기 ‘간첩 피해자’ 가족이라는 신분조차 쉽게 드러내기 힘들었기에 임씨는 손자에게 전씨 죽음과 관련한 이야기를 비밀로 했다. 임씨는 부모님 존재에 대해 묻는 손자를 향해 손자 유년 시절엔 “미국에 살고 있다”고, 사춘기 시절엔 “아빠가 죽고 엄마도 얼마 후 단순 사고로 죽었다”고 말했다.그러던 임씨는 말기 폐암으로 투병하던 2014년 1월 서른 살이 넘은 손자 김병집씨에게 며느리인 전씨 죽음에 대해 털어놓은 후 “한을 풀어달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임씨는 같은 해 5월 세상을 떠났다.김씨는 이후 본격적으로 국가를 상대로 진상규명에 배상을 요구했다. 국가정보원 등을 상대로 관련 기록 공개를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결국 그는 2018년 국가와 대구광역시를 상대로 5억원을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하지만 법원은 “국가의 과실이 있었다고 보기 어렵고, 전씨는 당시 국가보안법상 원호대상자도 아니었다. 아울러 소멸시효 5년이 지났다”며 청구를 기각했다.
    한광범 기자 2022.09.24
    [이데일리 한광범 기자] 1984년 9월 24일. 오후 1시 30분께 대구의 한 식당에서 주인 전갑숙(당시 29세)씨와 여종업원 강모(당시 18세)씨가 총을 맞고 쓰러진 채 발견됐다. 외출했다 돌아온 가정부 박모씨가 경찰에 신고했고, 총상을 입은 두 사람은 급하게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결국 사망했다.그리고 25분 후 인근의 한 미용실에서 총성이 울렸다. 미용실 주인 A씨는 세 발의 총을 맞고 쓰러졌다. A씨의 비명을 듣고 인근 제화점 주인 김모씨가 급하게 달려왔다.1984년 9월 25일자 경향신문 기사김씨는 A씨에게 총을 쏜 20대로 보이는 장발의 남성과 마주했다. 해당 남성은 총기를 김씨에게 겨누고 위협했다. 그리고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목을 졸리던 김씨는 해당 남성을 발로 차 넘어뜨렸다.그리고 현장에 달려온 다른 주민 2명이 합세해 이 남성을 제압했다. 제압당한 남성은 곧바로 소지품으로 갖고 있던 알약을 먹었다. 청산가리였다. 이 남성은 곧바로 숨졌다.도심 한복판에서 발생한 총기 난사 사건에 수사기관도 경악했다. 수사기관은 숨진 남성의 신원 파악에 나섰지만 어떠한 기록도 찾을 수 없었다. 범행에 사용한 총기는 벨기에제 브로닝 6·35구경 권총이었다. 당시 북한 대남 공작원들이 사용하던 총기였다. 총기엔 소음기가 달려있었다. 범인은 북한이 보낸 무장간첩이었던 것이다. 죽은 무장간첩은 검거 시 자살을 위해 청산가리와 함께 허리띠 버클에 자폭용 폭탄을 가지고 있었다. 또 간첩들이 사용하는 통신기기 등을 비롯해 대남 공작에 사용할 물품만 40여 점이었다. 대공기관은 이 간첩이 대남 테러공작 임무를 갖고 남한에 침투했다고 판단했다. 침투 시기와 루트는 사건이 있기 며칠 전인 9월 18~20일 사이 남해안으로 추정했다. 피해자 중 한 명인 식당 종업원 10대 강씨를 포섭하려 했으나, 강씨가 간첩 신분을 눈치채고 신고하려 했거나 자수를 권유했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식당 주인 전씨가 살해 장면을 목격하자 이를 죽였고, 자신의 얼굴을 본 적이 있는 A씨도 살해하려 했다는 추정이었다.1984년 9월 27일 동아일보 기사3개월 전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전씨는 사망 당시 10개월 된 아들을 두고 있었다. 아들은 결국 할머니 임춘자씨 손에 키워졌다.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웠던 임씨는 정부에 보상을 탄원해봤지만 아무런 경제적 지원도 받을 수 없었다. 엄혹했던 시기 ‘간첩 피해자’ 가족이라는 신분조차 쉽게 드러내기 힘들었기에 임씨는 손자에게 전씨 죽음과 관련한 이야기를 비밀로 했다. 임씨는 부모님 존재에 대해 묻는 손자를 향해 손자 유년 시절엔 “미국에 살고 있다”고, 사춘기 시절엔 “아빠가 죽고 엄마도 얼마 후 단순 사고로 죽었다”고 말했다.그러던 임씨는 말기 폐암으로 투병하던 2014년 1월 서른 살이 넘은 손자 김병집씨에게 며느리인 전씨 죽음에 대해 털어놓은 후 “한을 풀어달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임씨는 같은 해 5월 세상을 떠났다.김씨는 이후 본격적으로 국가를 상대로 진상규명에 배상을 요구했다. 국가정보원 등을 상대로 관련 기록 공개를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결국 그는 2018년 국가와 대구광역시를 상대로 5억원을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하지만 법원은 “국가의 과실이 있었다고 보기 어렵고, 전씨는 당시 국가보안법상 원호대상자도 아니었다. 아울러 소멸시효 5년이 지났다”며 청구를 기각했다.
  • 마리오·포켓몬·동숲의 고향…닌텐도, 1889년 오늘 창립[그해 오늘]
    [이데일리 김영환 기자] ‘마리오’, ‘포켓몬스터’, ‘동키콩’, ‘동물의숲’, ‘젤다의 전설’….아이들은 물론 웬만한 성인들도 알고 있는 게임을 만들어낸 회사 닌텐도가 1889년 9월23일 설립됐다. 닌텐도는 오락게임 산업분야에서 일본을 대표하는 기업으로, 전 세계의 비디오 게임 전문 회사 가운데 시가총액이 가장 크다.(사진=닌텐도)닌텐도는 지금으로부터 무려 130여 년 전인 1889년 창립됐다. 당시에는 ‘하나후다’라고 불리는 일본의 전통 화투를 만드는 회사였다. 회사에 일대 변혁이 불어닥친 건 창립자의 손자인 야마우치 히로시가 회사를 이어받은 이후다. 그는 1963년 회사명을 현재의 이름인 닌텐도로 바꿨고 1970년대 들어 기존 완구 제조 회사에서 비디오 게임기 제조업체로 탈바꿈시켰다.이후 몇 년간은 이렇다 할 히트 상품이 없어 회사가 도산할 위기에도 처했지만 첫 번째 히트작 ‘동키콩’이 나오면서 위기를 넘겼다. ‘킹콩’이 모태가 됐다는 이유에서 미국의 메이저 영화 배급사 유니버설 픽처스와 저작권을 놓고 사운을 건 소송전을 벌였는데 여기서 승소하면서 미국에서의 인지도가 크게 올라갔다.이후 마리오 시리즈가 히트하고 콘솔 게임기인 패미컴, 게임보이 등도 잇따라 성공하면서 닌텐도는 전성기를 구가했다. 1990년에 이미 영업이익이 1조2000억원을 넘어섰는데 당시 삼성, LG, 대우, 현대 등 한국의 10대 그룹의 이익을 넘어서는 규모였다.닌텐도는 이후 부침을 겪었지만 2000년대 중반 휴대용 게임기인 ‘닌텐도 DS’, 체감형 게임기인 ‘닌텐도 위’ 등을 크게 흥행시키면서 비디오 게임의 강자 면모를 다시금 보였다. 닌텐도 DS를 잇는 닌텐도 스위치 역시 높은 판매고를 올렸다.전세계인들이 스마트폰을 사용하고 있는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닌텐도 스위치는 발매 5년 만에 1억대를 팔아치웠다. 닌텐도의 현재 시가 총액은 63조원이 넘는 것으로 평가받는다.AR 게임 ‘포켓몬고’(사진=이데일리DB)닌텐도의 성공은 비단 비디오 게임기만이 아닌 확실한 소프트웨어를 보유한 데서 비롯됐다. 마리오는 물론, 포켓몬스터, 젤다의 전설과 같은 전 세계적 히트 시리즈를 여럿 개발해냈다. 닌텐도는 모바일로도 사업영역을 넓혀 오락게임 강자로서의 지위 유지에 나섰다. 지난 2016년 증강현실을 도입해 전 세계를 강타했던 ‘포켓몬고’ 역시 닌텐도의 작품이다.
    김영환 기자 2022.09.23
    [이데일리 김영환 기자] ‘마리오’, ‘포켓몬스터’, ‘동키콩’, ‘동물의숲’, ‘젤다의 전설’….아이들은 물론 웬만한 성인들도 알고 있는 게임을 만들어낸 회사 닌텐도가 1889년 9월23일 설립됐다. 닌텐도는 오락게임 산업분야에서 일본을 대표하는 기업으로, 전 세계의 비디오 게임 전문 회사 가운데 시가총액이 가장 크다.(사진=닌텐도)닌텐도는 지금으로부터 무려 130여 년 전인 1889년 창립됐다. 당시에는 ‘하나후다’라고 불리는 일본의 전통 화투를 만드는 회사였다. 회사에 일대 변혁이 불어닥친 건 창립자의 손자인 야마우치 히로시가 회사를 이어받은 이후다. 그는 1963년 회사명을 현재의 이름인 닌텐도로 바꿨고 1970년대 들어 기존 완구 제조 회사에서 비디오 게임기 제조업체로 탈바꿈시켰다.이후 몇 년간은 이렇다 할 히트 상품이 없어 회사가 도산할 위기에도 처했지만 첫 번째 히트작 ‘동키콩’이 나오면서 위기를 넘겼다. ‘킹콩’이 모태가 됐다는 이유에서 미국의 메이저 영화 배급사 유니버설 픽처스와 저작권을 놓고 사운을 건 소송전을 벌였는데 여기서 승소하면서 미국에서의 인지도가 크게 올라갔다.이후 마리오 시리즈가 히트하고 콘솔 게임기인 패미컴, 게임보이 등도 잇따라 성공하면서 닌텐도는 전성기를 구가했다. 1990년에 이미 영업이익이 1조2000억원을 넘어섰는데 당시 삼성, LG, 대우, 현대 등 한국의 10대 그룹의 이익을 넘어서는 규모였다.닌텐도는 이후 부침을 겪었지만 2000년대 중반 휴대용 게임기인 ‘닌텐도 DS’, 체감형 게임기인 ‘닌텐도 위’ 등을 크게 흥행시키면서 비디오 게임의 강자 면모를 다시금 보였다. 닌텐도 DS를 잇는 닌텐도 스위치 역시 높은 판매고를 올렸다.전세계인들이 스마트폰을 사용하고 있는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닌텐도 스위치는 발매 5년 만에 1억대를 팔아치웠다. 닌텐도의 현재 시가 총액은 63조원이 넘는 것으로 평가받는다.AR 게임 ‘포켓몬고’(사진=이데일리DB)닌텐도의 성공은 비단 비디오 게임기만이 아닌 확실한 소프트웨어를 보유한 데서 비롯됐다. 마리오는 물론, 포켓몬스터, 젤다의 전설과 같은 전 세계적 히트 시리즈를 여럿 개발해냈다. 닌텐도는 모바일로도 사업영역을 넓혀 오락게임 강자로서의 지위 유지에 나섰다. 지난 2016년 증강현실을 도입해 전 세계를 강타했던 ‘포켓몬고’ 역시 닌텐도의 작품이다.
  • "다른 인격이 죽였다"…끝까지 뻔뻔했던 10대 아동살해범[그해 오늘]
    [이데일리 한광범 기자] 2017년 9월 22일 오후 2시. 만 스무 살이 되지 않은 앳된 모습의 여성 2명이 수의를 입은 채 인천지방법원 413호 법정 피고인석에 나란히 앉았다. 각각 1998년생과 2000년생으로 당시 만 19세, 만 17세에 불과한 박모씨와 김모씨였다. 각각 재수생과 고교 자퇴생이었던 이들에게 적용된 혐의는 특정범죄 가중처벌법상 약취·유인, 살인, 사체 유기 등이었다.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여자아이를 집으로 유인해 잔혹하게 살해했다는 끔찍한 내용이었다. 법원은 이날 1심 판결을 통해 이들에게 각각 무기징역과 징역 20년형을 선고했다. 인천 초등학생 살인사건 주범인 김모(오른쪽)씨와 방조범 박모씨.(사진=연합뉴스)박씨와 김씨는 2017년 2월 한 캐릭터 커뮤니티에서 처음 알게 됐으며 살인 관련 영화나 소설 등에 공통적으로 관심을 가지며 더욱 가까워졌다. 두 사람의 대화는 ‘실제 사람을 죽여보고 싶다’는 데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2017년 3월 말 수시로 통화하며 김씨가 실제 살인을 한 후 사체 일부를 박씨에게 전달하기로 약속을 했다.김씨는 3월 29일 폐쇄회로(CC)TV 등에서 신원확인이 어렵도록 자신의 모친 옷을 입고 거주지 인근을 배회하며 범행 대상을 물색했다. 그리고 초등학교 저학년생을 범행 대상으로 삼기로 하고, 이를 박씨에게 알렸다. 이후 김씨는 초등학교 하교 시간에 맞춰 인근을 배회하다 A양(당시 7세)에게 “휴대전화를 빌려달라”는 부탁을 통해 A양을 자신의 집으로 유인해 살해했다. 유인과 살해, 그리고 사체를 훼손하는 과정에서 김씨와 박씨는 수시로 메시지를 주고받거나 통화를 했다.◇주범 체포되자 “내가 얽힐 수 있나” 메시지 보내그리고 당일 오후 두 사람은 서울의 한 지하철역에서 만났다. 이 자리에서 김씨는 박씨에게 시신 일부를 담은 봉투를 건넸다. 두 사람은 아무렇지 않게 함께 놀았다. 그러던 중 김씨가 자신의 모친으로부터 “경찰이 찾고 있다”는 전화를 받은 후 서로 주고받은 메시지 등을 모두 삭제했다. 박씨는 봉투에 담긴 시신 일부를 자신의 아파트에 유기했다. A양 가족의 신고를 받은 경찰은 김씨를 유력한 용의자로 보고 수사에 나섰고 그날 밤늦게 A양 시신을 발견한 후 김씨를 체포했다. 김씨가 체포된 직후 박씨는 김씨에게 “내가 얽힐 일은 없나요?”라는 메시지를 보냈고, 김씨는 “네가 전과 붙을 일은 없다고 장담할게”라고 답했다.김씨는 박씨에게 약속한 대로 체포된 이후 박씨의 범행 가담을 극구 부인했다. 주고받은 메시지에 대해선 “농담이었다”고 주장했다. 자신의 범행이 “내 안의 또 다른 인격이 저지른 범행”이라는 주장까지 폈다. 결국 경찰은 박씨에 대한 유의미한 진술을 듣지 못한 채 김씨를 검찰에 송치했다.2017년 3월말 인천 초등학생 살인사건이 발생했던 모 아파트 놀이터에 피해아동을 추모하기 위해 꽃이 놓아져 있다. (사진=연합뉴스)경찰은 김씨의 범행 당일 행적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박씨의 존재를 확인했고, 통화내역 등을 추가로 조사해 박씨를 4월 11일 구속했다. 김씨가 입을 열지 않아 검찰은 박씨에 대해 일단 살인방조 및 사체 유기 혐의만 적용해 재판에 넘겼다. 하지만 김씨는 박씨의 첫 번째 재판에서 증인으로 출석해 “박씨 지시를 받고 범행을 했다”고 증언했다. 검찰도 법원의 허락을 받아 박씨의 혐의를 살인방조가 아닌 살인죄로 변경했다. ◇만기출소해도 만 37세, 만 32세 불과검찰은 재판 도중 만 19세가 된 박씨에게 무기징역, 만 19세 이하로 소년법이 적용되는 김씨에겐 법정 최고형인 징역 20년을 구형했다. 1심 재판부도 검찰의 요청 그대로 형을 선고했다. 또 두 사람 모두에게 위치추적 전자장치 30년 부착도 함께 명령했다.두 사람의 항소로 진행된 2심에서 김씨는 “정신장애를 앓는 미성년자로서 범행 당시 심신미약 상태에 있었다”고 양형 부당을 주장했다. 박씨는 “김씨의 살인 관련 이야기를 가상의 상황이라고 받아들였을 뿐 도저히 실제 살인상황이라고 인식할 수 없었다”고 살인 혐의를 강력 부인했다.2심 재판부는 김씨 주장을 기각하고 1심과 같은 징역 20년과 전자장치 30년 부착 명령을 내렸다. 법원은 김씨에 대해 “도움이 필요할 때 도움을 요청할 줄 아는 어린이의 밝고 순수한 마음마저도 무참히 짓밟아 버렸다”며 “진지한 참회나 반성 없이 범행을 타인의 책임으로 돌리려고 하고 있다”고 질타했다.다만 박씨의 주장은 일부 받아들였다. 법원은 “(박씨 입장에선 범행 당시 대화를) 가상의 살인 상황에 대해 평소 나누던 대화의 연장선으로 볼 수 있다”며 살인 혐의를 무죄로 보고 살인방조와 사체 유기 혐의만 유죄로 판단했다. 박씨에겐 살인방조 혐의로는 이례적인 징역 13년형을 선고했다. 형은 2018년 9월 대법원에서 그대로 확정됐다.
    한광범 기자 2022.09.22
    [이데일리 한광범 기자] 2017년 9월 22일 오후 2시. 만 스무 살이 되지 않은 앳된 모습의 여성 2명이 수의를 입은 채 인천지방법원 413호 법정 피고인석에 나란히 앉았다. 각각 1998년생과 2000년생으로 당시 만 19세, 만 17세에 불과한 박모씨와 김모씨였다. 각각 재수생과 고교 자퇴생이었던 이들에게 적용된 혐의는 특정범죄 가중처벌법상 약취·유인, 살인, 사체 유기 등이었다.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여자아이를 집으로 유인해 잔혹하게 살해했다는 끔찍한 내용이었다. 법원은 이날 1심 판결을 통해 이들에게 각각 무기징역과 징역 20년형을 선고했다. 인천 초등학생 살인사건 주범인 김모(오른쪽)씨와 방조범 박모씨.(사진=연합뉴스)박씨와 김씨는 2017년 2월 한 캐릭터 커뮤니티에서 처음 알게 됐으며 살인 관련 영화나 소설 등에 공통적으로 관심을 가지며 더욱 가까워졌다. 두 사람의 대화는 ‘실제 사람을 죽여보고 싶다’는 데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2017년 3월 말 수시로 통화하며 김씨가 실제 살인을 한 후 사체 일부를 박씨에게 전달하기로 약속을 했다.김씨는 3월 29일 폐쇄회로(CC)TV 등에서 신원확인이 어렵도록 자신의 모친 옷을 입고 거주지 인근을 배회하며 범행 대상을 물색했다. 그리고 초등학교 저학년생을 범행 대상으로 삼기로 하고, 이를 박씨에게 알렸다. 이후 김씨는 초등학교 하교 시간에 맞춰 인근을 배회하다 A양(당시 7세)에게 “휴대전화를 빌려달라”는 부탁을 통해 A양을 자신의 집으로 유인해 살해했다. 유인과 살해, 그리고 사체를 훼손하는 과정에서 김씨와 박씨는 수시로 메시지를 주고받거나 통화를 했다.◇주범 체포되자 “내가 얽힐 수 있나” 메시지 보내그리고 당일 오후 두 사람은 서울의 한 지하철역에서 만났다. 이 자리에서 김씨는 박씨에게 시신 일부를 담은 봉투를 건넸다. 두 사람은 아무렇지 않게 함께 놀았다. 그러던 중 김씨가 자신의 모친으로부터 “경찰이 찾고 있다”는 전화를 받은 후 서로 주고받은 메시지 등을 모두 삭제했다. 박씨는 봉투에 담긴 시신 일부를 자신의 아파트에 유기했다. A양 가족의 신고를 받은 경찰은 김씨를 유력한 용의자로 보고 수사에 나섰고 그날 밤늦게 A양 시신을 발견한 후 김씨를 체포했다. 김씨가 체포된 직후 박씨는 김씨에게 “내가 얽힐 일은 없나요?”라는 메시지를 보냈고, 김씨는 “네가 전과 붙을 일은 없다고 장담할게”라고 답했다.김씨는 박씨에게 약속한 대로 체포된 이후 박씨의 범행 가담을 극구 부인했다. 주고받은 메시지에 대해선 “농담이었다”고 주장했다. 자신의 범행이 “내 안의 또 다른 인격이 저지른 범행”이라는 주장까지 폈다. 결국 경찰은 박씨에 대한 유의미한 진술을 듣지 못한 채 김씨를 검찰에 송치했다.2017년 3월말 인천 초등학생 살인사건이 발생했던 모 아파트 놀이터에 피해아동을 추모하기 위해 꽃이 놓아져 있다. (사진=연합뉴스)경찰은 김씨의 범행 당일 행적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박씨의 존재를 확인했고, 통화내역 등을 추가로 조사해 박씨를 4월 11일 구속했다. 김씨가 입을 열지 않아 검찰은 박씨에 대해 일단 살인방조 및 사체 유기 혐의만 적용해 재판에 넘겼다. 하지만 김씨는 박씨의 첫 번째 재판에서 증인으로 출석해 “박씨 지시를 받고 범행을 했다”고 증언했다. 검찰도 법원의 허락을 받아 박씨의 혐의를 살인방조가 아닌 살인죄로 변경했다. ◇만기출소해도 만 37세, 만 32세 불과검찰은 재판 도중 만 19세가 된 박씨에게 무기징역, 만 19세 이하로 소년법이 적용되는 김씨에겐 법정 최고형인 징역 20년을 구형했다. 1심 재판부도 검찰의 요청 그대로 형을 선고했다. 또 두 사람 모두에게 위치추적 전자장치 30년 부착도 함께 명령했다.두 사람의 항소로 진행된 2심에서 김씨는 “정신장애를 앓는 미성년자로서 범행 당시 심신미약 상태에 있었다”고 양형 부당을 주장했다. 박씨는 “김씨의 살인 관련 이야기를 가상의 상황이라고 받아들였을 뿐 도저히 실제 살인상황이라고 인식할 수 없었다”고 살인 혐의를 강력 부인했다.2심 재판부는 김씨 주장을 기각하고 1심과 같은 징역 20년과 전자장치 30년 부착 명령을 내렸다. 법원은 김씨에 대해 “도움이 필요할 때 도움을 요청할 줄 아는 어린이의 밝고 순수한 마음마저도 무참히 짓밟아 버렸다”며 “진지한 참회나 반성 없이 범행을 타인의 책임으로 돌리려고 하고 있다”고 질타했다.다만 박씨의 주장은 일부 받아들였다. 법원은 “(박씨 입장에선 범행 당시 대화를) 가상의 살인 상황에 대해 평소 나누던 대화의 연장선으로 볼 수 있다”며 살인 혐의를 무죄로 보고 살인방조와 사체 유기 혐의만 유죄로 판단했다. 박씨에겐 살인방조 혐의로는 이례적인 징역 13년형을 선고했다. 형은 2018년 9월 대법원에서 그대로 확정됐다.
  • 살인마 유영철에겐 사법부조차 하찮게 보였다[그해 오늘]
    [이데일리 한광범 기자] 2004년 9월 21일 오후 4시. 서울 서초동 소재 서울법원종합청사 417호 대법정에서 큰 소란이 일어났다. 수갑을 찬 채 재판을 받던 피고인이 소리를 지르며 재판부가 위치한 법대를 향해 달려든 것. 근처에 있던 교도관들이 급하게 제지해 피고인은 법대까지 다다르지 못했다.사건의 주인공은 수십 명을 잔혹하게 죽인, 희대의 살인마 ‘유영철’이었다. 유영철이 이 같이 행동을 하게 된 것은 재판부가 자신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연쇄살인범 유영철의 과거 모습(좌)과 최근 모습(우). (사진=SBS ‘그것이 알고 싶다’ 갈무리)유영철은 이날 재판이 끝날 무렵 발언권을 얻어 “검찰과 경찰은 물론이고 재판부도 신뢰하지 않는다. 다시 법정에 진짜 안 나오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1심 재판부인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1부 재판장이었던 황찬현 부장판사(현 변호사, 감사원장 역임)는 “다음 기일에도 나와서 밝힐 것 밝히고 진술하는 것을 잘 생각해보라”며 이를 일축했다. 이에 유영철이 “생각해보라는 것이 아니라 안 나온다고요”라고 소리를 지르며 법대를 향해 달려든 것이다. 10여 명의 교도관이 제지하는 동안에도 유영철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1970년생으로 3남 1녀 중 셋째였던 유영철은 어린 시절부터 교도소를 제집 드나들듯 했다. 고등학교 재학 시절인 1988년 절도 혐의로 구속돼 소년부송치처분을 받은 것을 시작으로 수차례 처벌을 받았지만 전혀 교화되지 않았다.유영철은 고교 중퇴 후 사진기사, 중장비기사, 선원, 음식점 종업원 등으로 근무하다 1995년 이후부턴 경찰관을 사칭해 불법유흥주점이나 노점상을 상대로 갈취행위를 하는 방식으로 돈을 모았다.이렇게 쌓인 전과로 △1991년 특수절도 징역 10월 △1993년 절도 징역 8월 △1995년 음란물 판매 벌금 300만원 △1998년 경찰관사칭 징역 2년 △2000년 경찰관사칭 및 미성년자 강간 징역 3년 6월 등으로 수감 생활을 했다. 유영철은 강간 혐의로 복역 후 2003년 9월 만기출소한 직후부터 사회에 대한 불만과 적개심을 드러내며 연쇄살인을 계획했다. 사회에 불만을 품게 된 이유는 ‘원하던 집행유예 판결 대신 실형이 선고됐기 때문’이었다. 유영철의 연쇄살인 범행을 모티브로 한 영화 ‘추격자’의 한 장면.(사진=쇼박스)애초 유영철은 교도소에서 이혼을 당하고, 만 19세에 얻은 아들의 양육권을 빼앗기자 전처와 아들을 살해할 계획을 세웠다가 다른 사람들로 범행 대상을 바꿨다. 구체적으로 100명을 살해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개를 상대로 살인 연습을 하거나 범행 도구를 직접 제작하기도 했다. 유영철의 살인 행각은 출소 13일 뒤인 2003년 9월 24일부터 2004년 7월 15일까지 계속됐다. 범행 대상으로는 오직 여성이나 노약자, 장애인 등 자신보다 힘이 약한 사람만을 노렸다. 대상엔 ‘젊은 성인 남성’은 일절 없었다. 특히 범행에 취약한 보도방 여성 등을 자신의 집으로 불러들여 살해하는 수법을 반복했다.하지만 체포된 이후에도 수사기관이나 재판에서 내내 피해자 탓만 했다. 자신보다 약한 대상만을 골라 살인한 유영철은 수사기관과 법정에서 자신의 범행을 과시하듯 떠벌렸다. 자신이 죽인 여성들을 향해 “죽을 사람이 죽었다”는 식의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법원은 “피해자가 20명이고 대상도 대부분 연약한 노인이거나 여성”이라며 “반인륜적이고 엽기적 범행으로 사회에 큰 충격과 경악을 준 만큼 영원히 사회로부터 격리시켜야 한다”며 사형을 선고했다. 유영철에 대한 사형은 2005년 6월 확정됐다. 현재 대구교도소에서 사형수 신분으로 수감 중이다.
    한광범 기자 2022.09.21
    [이데일리 한광범 기자] 2004년 9월 21일 오후 4시. 서울 서초동 소재 서울법원종합청사 417호 대법정에서 큰 소란이 일어났다. 수갑을 찬 채 재판을 받던 피고인이 소리를 지르며 재판부가 위치한 법대를 향해 달려든 것. 근처에 있던 교도관들이 급하게 제지해 피고인은 법대까지 다다르지 못했다.사건의 주인공은 수십 명을 잔혹하게 죽인, 희대의 살인마 ‘유영철’이었다. 유영철이 이 같이 행동을 하게 된 것은 재판부가 자신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연쇄살인범 유영철의 과거 모습(좌)과 최근 모습(우). (사진=SBS ‘그것이 알고 싶다’ 갈무리)유영철은 이날 재판이 끝날 무렵 발언권을 얻어 “검찰과 경찰은 물론이고 재판부도 신뢰하지 않는다. 다시 법정에 진짜 안 나오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1심 재판부인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1부 재판장이었던 황찬현 부장판사(현 변호사, 감사원장 역임)는 “다음 기일에도 나와서 밝힐 것 밝히고 진술하는 것을 잘 생각해보라”며 이를 일축했다. 이에 유영철이 “생각해보라는 것이 아니라 안 나온다고요”라고 소리를 지르며 법대를 향해 달려든 것이다. 10여 명의 교도관이 제지하는 동안에도 유영철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1970년생으로 3남 1녀 중 셋째였던 유영철은 어린 시절부터 교도소를 제집 드나들듯 했다. 고등학교 재학 시절인 1988년 절도 혐의로 구속돼 소년부송치처분을 받은 것을 시작으로 수차례 처벌을 받았지만 전혀 교화되지 않았다.유영철은 고교 중퇴 후 사진기사, 중장비기사, 선원, 음식점 종업원 등으로 근무하다 1995년 이후부턴 경찰관을 사칭해 불법유흥주점이나 노점상을 상대로 갈취행위를 하는 방식으로 돈을 모았다.이렇게 쌓인 전과로 △1991년 특수절도 징역 10월 △1993년 절도 징역 8월 △1995년 음란물 판매 벌금 300만원 △1998년 경찰관사칭 징역 2년 △2000년 경찰관사칭 및 미성년자 강간 징역 3년 6월 등으로 수감 생활을 했다. 유영철은 강간 혐의로 복역 후 2003년 9월 만기출소한 직후부터 사회에 대한 불만과 적개심을 드러내며 연쇄살인을 계획했다. 사회에 불만을 품게 된 이유는 ‘원하던 집행유예 판결 대신 실형이 선고됐기 때문’이었다. 유영철의 연쇄살인 범행을 모티브로 한 영화 ‘추격자’의 한 장면.(사진=쇼박스)애초 유영철은 교도소에서 이혼을 당하고, 만 19세에 얻은 아들의 양육권을 빼앗기자 전처와 아들을 살해할 계획을 세웠다가 다른 사람들로 범행 대상을 바꿨다. 구체적으로 100명을 살해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개를 상대로 살인 연습을 하거나 범행 도구를 직접 제작하기도 했다. 유영철의 살인 행각은 출소 13일 뒤인 2003년 9월 24일부터 2004년 7월 15일까지 계속됐다. 범행 대상으로는 오직 여성이나 노약자, 장애인 등 자신보다 힘이 약한 사람만을 노렸다. 대상엔 ‘젊은 성인 남성’은 일절 없었다. 특히 범행에 취약한 보도방 여성 등을 자신의 집으로 불러들여 살해하는 수법을 반복했다.하지만 체포된 이후에도 수사기관이나 재판에서 내내 피해자 탓만 했다. 자신보다 약한 대상만을 골라 살인한 유영철은 수사기관과 법정에서 자신의 범행을 과시하듯 떠벌렸다. 자신이 죽인 여성들을 향해 “죽을 사람이 죽었다”는 식의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법원은 “피해자가 20명이고 대상도 대부분 연약한 노인이거나 여성”이라며 “반인륜적이고 엽기적 범행으로 사회에 큰 충격과 경악을 준 만큼 영원히 사회로부터 격리시켜야 한다”며 사형을 선고했다. 유영철에 대한 사형은 2005년 6월 확정됐다. 현재 대구교도소에서 사형수 신분으로 수감 중이다.
  • ‘국정농단 게이트’ 서막…최순실, 언론 전면에 등장[그해 오늘]
    [이데일리 김영환 기자] 전국경제인연합회 등이 미르문화재단과 K스포츠재단에 800억원이 넘는 돈을 모금했다는 사실이 불거지고 그 가운데 안종범 청와대 정책조정수석 등이 개입했다는 정황이 알려지면서 이 사건은 권력형 비리의 의혹이 가득했다.국정농단 사건의 핵심 인물인 최순실 씨 (사진=연합뉴스)2016년 9월 20일 ‘한겨레신문’이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 이사에 취임한 최순실(최서원으로 개명)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면서 사건은 변곡점을 맞았다. 최씨는 박근혜 전 대통령과 가까웠던 최태민 목사의 다섯째 딸이자, 박 전 대통령을 의원 시절부터 보좌하던 정윤회씨의 전처였다.청와대는 육탄 방어에 들어가면서 최씨를 비호했다. 당시 야권은 최순실을 국감 증인으로 채택하려고 했으나 이정현 당시 새누리당 대표가 비공개 단식에까지 돌입하는 농성 끝에 국감 증인 채택을 막아섰다. (사진=이데일리DB)사건은 유야무야될 것처럼 보였으나 이번에는 최씨가 박 전 대통령의 연설문을 사전에 받아봤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역시 청와대는 강력하게 부인했다. 이원종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은 “그런 일은 봉건시대에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일축했다.여기에 더해 박 전 대통령은 10차 개헌 논의를 꺼내 들면서 정국 전환을 시도했다. 실제 각 정당과 차기 대선후보들이 개헌 논의에 대해 백가쟁명을 벌이면서 정치권은 혼란에 접어들었다.그러나 청와대가 완고히 부인했던 연설문 사전 불출 의혹이 입증되는 증거가 터져 나왔다. JTBC ‘뉴스룸’이 최순실이 사용하던 태블릿 PC를 입수했다고 보도한 것이다. 여기에는 대통령이 된 이후 연설문까지 포함됐고 심지어 극비였던 ‘드레스덴 연설문’까지 담겨 있었다.이전까지는 의혹 제기 수준에 그쳤던 언론 보도가 확실한 물증을 포착하면서 민심이 크게 요동쳤다. 단순한 권력형 비리라고 생각되던 사건이 민간인에 의한 국정 농단 사태로 성격을 바꾸게 됐다. 선출직 박 전 대통령을 대신해 측근일뿐인 최씨가 국정을 좌지우지한 데 대한 후폭풍이 거세졌다.결국 2016년 12월 9일 불참 1명, 찬성 234표, 반대 56표, 무효 7표로 대한민국 국회에서 박근혜 대통령 탄핵 소추안이 가결됐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 이은 두 번째 대통령 탄핵안 가결이다. 박 전 대통령은 2017년 3월 10일 오전 11시 21분, 헌법재판소에서 재판관 8명의 만장일치로 탄핵이 인용돼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김영환 기자 2022.09.20
    [이데일리 김영환 기자] 전국경제인연합회 등이 미르문화재단과 K스포츠재단에 800억원이 넘는 돈을 모금했다는 사실이 불거지고 그 가운데 안종범 청와대 정책조정수석 등이 개입했다는 정황이 알려지면서 이 사건은 권력형 비리의 의혹이 가득했다.국정농단 사건의 핵심 인물인 최순실 씨 (사진=연합뉴스)2016년 9월 20일 ‘한겨레신문’이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 이사에 취임한 최순실(최서원으로 개명)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면서 사건은 변곡점을 맞았다. 최씨는 박근혜 전 대통령과 가까웠던 최태민 목사의 다섯째 딸이자, 박 전 대통령을 의원 시절부터 보좌하던 정윤회씨의 전처였다.청와대는 육탄 방어에 들어가면서 최씨를 비호했다. 당시 야권은 최순실을 국감 증인으로 채택하려고 했으나 이정현 당시 새누리당 대표가 비공개 단식에까지 돌입하는 농성 끝에 국감 증인 채택을 막아섰다. (사진=이데일리DB)사건은 유야무야될 것처럼 보였으나 이번에는 최씨가 박 전 대통령의 연설문을 사전에 받아봤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역시 청와대는 강력하게 부인했다. 이원종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은 “그런 일은 봉건시대에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일축했다.여기에 더해 박 전 대통령은 10차 개헌 논의를 꺼내 들면서 정국 전환을 시도했다. 실제 각 정당과 차기 대선후보들이 개헌 논의에 대해 백가쟁명을 벌이면서 정치권은 혼란에 접어들었다.그러나 청와대가 완고히 부인했던 연설문 사전 불출 의혹이 입증되는 증거가 터져 나왔다. JTBC ‘뉴스룸’이 최순실이 사용하던 태블릿 PC를 입수했다고 보도한 것이다. 여기에는 대통령이 된 이후 연설문까지 포함됐고 심지어 극비였던 ‘드레스덴 연설문’까지 담겨 있었다.이전까지는 의혹 제기 수준에 그쳤던 언론 보도가 확실한 물증을 포착하면서 민심이 크게 요동쳤다. 단순한 권력형 비리라고 생각되던 사건이 민간인에 의한 국정 농단 사태로 성격을 바꾸게 됐다. 선출직 박 전 대통령을 대신해 측근일뿐인 최씨가 국정을 좌지우지한 데 대한 후폭풍이 거세졌다.결국 2016년 12월 9일 불참 1명, 찬성 234표, 반대 56표, 무효 7표로 대한민국 국회에서 박근혜 대통령 탄핵 소추안이 가결됐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 이은 두 번째 대통령 탄핵안 가결이다. 박 전 대통령은 2017년 3월 10일 오전 11시 21분, 헌법재판소에서 재판관 8명의 만장일치로 탄핵이 인용돼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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