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태호의 그림&스토리]<18>신궁의 후예들 미래를 향해 쏴라

▲강희언 '사인사예' 김형근 '과녁'으로 본 활의 정신
신분 구애 없이 심신 수양한 활쏘기
주몽부터 정조까지 신궁 이름 높아
활쏘는 선비 그린 강희언 '사인사예'
국궁 현대적 재해석한 김형근 '과녁'
과거서 미래로 나아가는 전통 위력
  • 등록 2021-06-11 오전 3:30:00

    수정 2021-06-11 오전 6:08:43

담졸 강희언이 그린 ‘사인사예’. 18세기 작품으로만 전한다. 세 가지 주제로 엮은 ‘사인삼경도첩’(士人三景圖帖)에 들었다. ‘사인사예’ 외에 대청마루에 엎드려 저마다 그림에 열중하고 있는 선비들을 그린 ‘사인휘호’, 나무그늘 아래서 시를 짓고 책을 읽고 시상에 몰두하는 선비들을 그린 ‘사인시음’이 있다. 이전까지 사인의 풍류를 묘사했던 인습적 권위에서 탈피하고 표현의 영역을 대폭 확대해 이후 기법·소재 등 조선 풍속화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종이에 수묵담채, 26×21㎝, 개인 소장.
혹독한 세상살이에 그림이 무슨 대수냐고 했습니다. 쫓기는 일상에 미술이 무슨 소용이냐고 했습니다. 옛 그림이고 한국미술이라면 더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사는 일을 돌아보면 말입니다. 치열하지 않은 순간이 어디 있었고, 위태롭지 않은 시대가 어디 있었습니까. 한국미술은 그 척박한 세월을 함께 견뎌온 지혜였고 부단히 곧추세운 용기였습니다. 옛 그림으로 세태를 읽고 나를 세우는 법을 일러주는 손태호 미술평론가가 이데일리와 함께 그 장면, 장면을 들여다봅니다. 조선부터 근현대까지 시공을 넘나들며, 시대와 호흡한 삶, 역사와 소통한 현장에서 풀어낼 ‘한국미술로 엿보는 세상이야기’ ‘한국미술로 비추는 사람이야기’입니다. 때론 따뜻한 위로로 때론 따가운 죽비로 매주 금요일 독자 여러분을 아트인문학의 세계로 안내합니다. <편집자주>

[손태호 미술평론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도쿄올림픽이 결국 개최될 모양입니다. 오직 올림픽을 바라보며 피땀으로 준비해왔던 선수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코로나19 위기 상황에서 올림픽을 개최한다는 것이 너무나 위험한 일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올림픽이 단순히 선수들만을 위한 행사가 아니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이런 위험을 무릅쓰고 올림픽을 강행하겠다는 일본 정부의 무책임함이 놀라울 따름입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도쿄올림픽지도에 독도를 자국 영토로 표시해 우리 국민의 분노를 폭발시키고 있습니다.

이런 ‘정치적 상황’이 아니라면 올림픽 자체는 세계인을 감동케 하는 행사입니다. 모든 종목이 다 그렇지만 그중 무엇보다 한국인을 감격케 하는 특별한 종목이 있습니다. 양궁입니다. 우리나라가 금메달을 다른 나라에 절대 내주지 않는 양궁은 우리 입장에서는 대회의 하이라이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특히 여자 단체 양궁은 올림픽에서 무려 8연패라는 경이로운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한국의 독무대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우리 민족이 언제부터 이처럼 활을 잘 쐈던 걸까요. 아마 고대부터일 겁니다. 수많은 그림들이 그렇게 일러줍니다. 고구려 고분벽화부터 활쏘기와 관련된 작품이 아주 많이 그려졌던 것이지요. 그중 하나를 고르는 일은 절대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굳이 그 어려운 일을 해야 한다면 담졸 강희언(1738∼1784 이전)의 ‘사인사예’(士人射藝)를 꼽겠습니다. 회화성으로 보나 구성으로 보나 활쏘기 그림에선 단연 최고봉이라 할 만합니다.

남과 여, 양과 음, 침묵의 소리 대비한 ‘사인사예’

시작은 오른쪽 소나무 한 그루부터입니다. 왼쪽 아래 방향으로 비스듬히 뻗은 가지를 멀리 개울가와 같은 사선으로 그려 전경과 후경을 자연스럽게 구분한 덕입니다. 나무기둥은 윤곽선이 없이 그린 뒤 먹의 농담만으로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껍질을 표현했고 솔잎은 푸른색 선염(화면에 물을 칠하고 마르기 전 물감을 칠해 몽롱하면서 무거운 맛을 나타내는 채색기법)으로 표현했습니다. 나무 아래에 그림의 주인공들이 있습니다. 갓을 쓴 선비 셋이 보이는데 한 선비는 활시위를 당겨 막 화살을 쏘기 직전이고, 한 선비는 다음 화살을 잡으려고 하며, 나머지 한 선비는 활을 무릎에 끼운 채 앉아 있습니다.

그림 안쪽 나뭇가지 저 너머로는 개울가가 보입니다. 아낙들이 푸른치마를 허벅지까지 올리고 빨래를 하는 중입니다. 힘껏 치켜들었다가 내리칠 방망이 소리가 여기까지 들릴 것만 같습니다. 활터와 빨래터라,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이 조화에 그림의 묘미가 있습니다. 바로 ‘소리의 시각화’입니다. 예부터 활 쏘는 곳에서는 이른바 ‘습사무언’(習射無言)이라 해 말을 삼가는 것이 기본 덕목입니다. 그럼에도 화가는 요란한 빨래 방망이 소리를 그림에 들여 활터의 침묵과 묘한 대비를 끌어낸 것입니다. 이 ‘침묵과 소리’는 ‘남과 여’ ‘양과 음’과 함께 그림이 의도한 주요한 대비법입니다.

활 쏘는 선비들에서는 옛 활쏘기 방식을 엿볼 수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시위를 활에 걸 때는 양반다리를 한 후 양 무릎에 활을 끼운 채 겁니다. 조선의 각궁은 일본 활이나 서양 활과는 달리 쇠뿔·나무·힘줄 등을 여러 겹으로 만든 복합궁이라 탄성이 매우 강해 활시위를 걸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자세를 취한 이가 왼쪽 아래 앉아 활을 만지는 선비입니다. 활시위를 힘껏 당긴 다른 선비의 허리춤에는 화살 두 발이 매달려 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보통 사대에 올라갈 때 이처럼 화살을 허리띠에 꽂고 올라가 하나씩 뽑아 쐈습니다. 한 번에 다섯 발씩 쏘는데 두 사람이 한 발씩 교대로 쏩니다. 이에 비춰볼 때 이 선비는 세 번째 화살을 쏘기 직전이고, 또다른 선비는 세 번째 화살을 준비 중이란 걸 알 수 있습니다. 팔뚝에 찬 완대로 볼 때 한 사람은 왼손잡이, 다른 사람은 오른손잡이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담졸 강희언이 그린 ‘사인사예’의 부분. 활터에서 활을 쏘는 선비들(오른쪽)과 개울가에서 빨래하는 아낙들. 화가는 요란한 빨래 방망이 소리를 그림에 들여 활터의 침묵과 대비를 꾀했다.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이 조화에 그림의 묘미가 있다.
임금·양반·양민 막론하고 누구나 즐긴 국민스포츠

그림은 활쏘기 자세도 알려줍니다. 사대에 오른 두 선비의 발 방향은 팔(八)자도, 정(丁)도 아닌 어중간한 모습인데 이 자세를 부르는 이름이 있습니다. ‘비정비팔’(非丁非八), 바로 우리 국궁의 기본자세입니다. 무게중심을 살짝 앞쪽으로 옮기며 발사하는데, 팔의 힘만이 아니라 온몸의 탄성을 활의 탄성과 결합해야 멀리 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조선시대 활쏘기가 중국이나 일본보다 먼 120보(144m)를 기준으로 하고, 무관시험 때는 150보(180m)까지 쏘게 했던 데는 이런 원리가 있었던 겁니다. 현재 올림픽 양궁거리가 70m이니 조선의 활쏘기 거리는 이보다 두 배 이상 멀었습니다.

조선후기 문인이자 화가이면서 평론가였던 표암 강세황(1713∼1791)은 그림의 발문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편안할 때 연습하고 위태할 때 사용하니, 연북인(硏北人·문인 등 문필에 종사하는 사람)은 매우 부끄러울 것이다. 우리나라의 이러한 광경이 여기에서 극에 달했다.”

고대부터 지금껏 우리 민족에게는 활쏘기의 특출함이 있습니다. 고구려 시조 주몽(朱夢)에 대해 ‘삼국사기’는 주몽이 일곱 살 때 대나무로 만든 활로 파리를 잡았다는 기록을 전합니다. 고구려를 침략한 당 태종은 장수 양만춘의 화살에 한쪽 눈을 잃었다고도 합니다. 조선의 임금 중 특히 태조와 태종, 정조는 신궁으로 이름이 높았습니다. 게다가 활쏘기는 단순한 기예가 아니었습니다. 몸과 마음을 닦고, 동맹체를 결속시키기 위한 치열한 수련이었으며, 무인만이 아니라 임금·양반·양민을 막론하고 누구나 권하고 즐겼던 국민스포츠였습니다. 이런 전통이 면면히 흐르고 있기에 올림픽 8연패라는 전무후무한 기록도 나올 수 있었을 것입니다.

비단 활쏘기뿐만 아닙니다. 활 관련 그림에서도 전통은 이어져 현대적 감각의 명작이 탄생하기도 했습니다. 그 대표작이 바로 서양화가 김형근(91) 화백이 1970년에 그린 ‘과녁’입니다. 작품은 그해 ‘제19회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했고, 지금은 청와대가 소장하고 있습니다.

화살 꽂힌 나무표적의 회화미 극대화한 ‘과녁’

그림은 둥근 표적이 있는 나무과녁과 화살 3개가 전부입니다. 하지만 묘사는 단순치 않습니다. 나무판은 질감이 느껴질 만큼 사실적이고 생동감이 넘칩니다. 과녁은 현대의 양궁과는 다른 국궁의 과녁으로 실제는 직선이 원 위에 있는데 회화적 안정감을 위해 반대로 그린 듯합니다. 표적에 활촉 자국은 보이지 않으나 화살 두 개는 비스듬히 꽂히게, 한 개는 땅에 닿게 한 뒤 각각의 그림자를 묘사해 사실감을 높였습니다.

김형근의 ‘과녁’(1970). 시위를 떠난 화살이 과녁에 박힌 순간을 사실주의적으로 그렸다. ‘대통령’과 인연이 많은 작품이다. 1970년 ‘제19회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대통령상을 받았고, 이후 청와대의 소장품이 됐다. 당시 제대로 된 미술교육을 받은 적 없는, 지방 공무원 신분 작가의 작품으로도 화제가 됐다. “한국사람은 옛부터 과녁을 썼다”며 “둥근 것은 한국인의 혼을 뜻한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캔버스 유화, 162×130㎝, 청와대 소장.
물론 작품은 활쏘기의 풍속이나 의미를 표현한 게 아닌 화살에 꽂힌 과녁의 회화미를 보여줍니다. 그럼에도 이런 그림이 나올 수 있었던 건 그만큼 활쏘기가 대중적이고 익숙했기 때문입니다. 화가는 토속적인 소재에 주목해 전통을 현대적 감각에 맞게 재해석하는 작업을 해왔습니다. 이런 부단한 노력의 결실이 화단에서 인정받고 대중에게 감동을 줘 그의 작품은 높은 가격에 거래되기도 합니다.

1885년부터 한 해 동안 한반도를 여행한 러시아 장교들이 쓴 책 ‘내가 본 조선, 조선인’은 “다른 사람들이 모방할 수 없을 정도로 조선인은 활을 잘 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9세기 한양 성곽 안팎에 활터만 마흔여덟 곳이 있었을 만큼 활쏘기는 우리 민족의 생활 그 자체였습니다. ‘사인사예’부터 ‘과녁’까지 이어지는 활쏘기 그림은 전통의 위력을 보여주는 한 장면입니다. 옛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는 ‘법고창신’의 의미를 옛 화살에 묻혀 현대의 과녁으로 쏴주는 듯합니다. 화살은 이내 다른 과녁을 향해 날아갈 것이고요, 그래서 과녁은 화살의 종착지가 아닌 여정입니다.

△손태호 미술평론가는…

30대 중반 도망치고 싶던 때가 있었다. 세상살이가 버겁고 고달파서. 막막하던 그 시절, 늘 그렇듯 삶의 퍼즐은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풀렸다. 그즈음 눈에 띈 옛 그림이 우연이었고 그 흔적을 좇아 미술관·고서화점 등을 누비고 다닌 게 필연이었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에 찍힌 인장 ‘장무상망’(長毋相忘·오래도록 서로 잊지 말자)을 보고 어째서 ‘그림이 삶, 삶이 그림’이라 하는지 깨달았다. 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한 과학도의 길은 그날로 접혔다. 동국대 대학원 미술학과로 진학해 석·박사학위를 받은 뒤 한국미술 전문가가 됐다. 조선회화·불교미술에 기둥을 세우고 그 안에 스민 상징 같은 ‘옛 그림’은 거울로 곁에 뒀다. 지금은 한국문화예술조형연구소 학술이사로 있으면서 이론·현장을 연결한 연구, 인물·지리·역사를 융합한 글과 강연에 매진하고 있다. 저서로 ‘조선불상의 탄생’(한국학술정보·2020), ‘다시 활시위를 당기다’(아트북스·2017), ‘나를 세우는 옛 그림’(아트북스·2012)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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