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우리 자본시장에는 제도개혁 성공의 기억만큼이나 실패의 역사도 적지 않다. 말과 제도는 저 앞에 가 있지만 시장 참가자의 관행이나 감독과 정책결정이 진정한 시장수요에 기초하지 않는 바람에 현실과 겉도는 제도들이 비일비재하다. 우리가 서구에서 시작한 ESG규범을 늦지 않게 정착시키려면 어떤 자세를 취하는 것이 바람직할까.
필자는 먼저 코로나 위기 발생 전인 2019년 겨울에 만난 유럽 증권 및 회계감독의 권위자 미쉘 프라다와 나눈 대화가 떠오른다. 그는 최근의 ESG열풍과 관련, “환경(E)은 과학이고 사회(S)는 정치이며 지배구조(G)는 법률인데 어떻게 이렇게 넓고 서로 상이한 규범들을 하나로 모아 성급하게 규범화하려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 유럽의 ESG 규범화에 대한 개인적인 우려를 표명했다.
필자는 이에 대해 ESG의 이 같은 내재적인 충돌문제가 소위 국제적인 ESG기준을 마련하는 이들의 고민이라면 아직도 신흥시장 취급을 받고 있는 우리 자본시장은 그 늦은 발전단계에서 오는 도전과제들을 해결하는 게 더 큰 과제라고 말한 기억이 있다. 즉 ESG에 대한 자발성과 역량 부족 그리고 모니터를 하고 정확한 정보가 생성될 수 있는 인프라의 미흡 문제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해결하는냐가 문제라는 얘기였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경제주체들의 ESG 활동이 미흡하다고 해서 ESG 제도의 조속한 정착을 이유로 정부의 과다한 개입을 정당화해서는 안되며 어디까지나 시장 참가자의 자발성과 창의성이 그 근간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참고로 2020년 국제증권감독기구(IOSCO)가 금융기관 종사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ESG 정착을 위한 정부의 역할에 대한 국가별 의견조사 결과(복수응답)를 보면 정부는 ESG 공시의 일관성과 투명성을 보장해야 한다는 응답이 83%, 그린 워싱(외견상만의 ESG)을 방지해야 한다는 응답이 45%를 차지했다. 즉, 정부는 기업의 ESG 공시가 이뤄지면 이를 검증하고 그 기준과 리스크가 투명하게 시장에 알려지도록 감시자의 역할을 해달라는 얘기다.
반면, 자본시장 참가자들의 ESG의 실천에 필요한 하부구조의 형성에 있어서는 정부의 역할이 긴요하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ESG의 효과를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도록 하고 그 효과를 기업정보에 공정하고 투명하게 반영해 큰 혼란없이 상이한 국가들끼리도 비교가능한 제도를 발전시키는 일 등이다.
통합공시와 다기화된 ESG 공시기준을 통합하는 작업을 하고 있으므로 IASB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는 대한민국이 적극적인 역할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끝으로 글로벌 ESG 규범화의 맥락에서 유럽의 탄소국경조정세 도입과 같은 새로운 비관세 장벽 문제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통상협상을 통해 우리 상품과 서비스에 불필요한 부담을 최소화하고 국익을 극대화하는 ESG 대외협상전략이 준비돼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