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보다 ‘백신허브’를 지향점으로 설정한 정부의 전략은 세계적인 전염병이 일상화되는 시대적 상황이기에 적절한 판단으로 평가된다. 지난해 백신자급을 통한 코로나 박멸보다 K방역을 국정의 주안점으로 삼다 나중 코로나 대창궐이라는 ‘쓴 맛’을 본 우리로서는 만시지탄이지만 환영할 만한 인식의 대전환이다.
정부가 글로벌 백신허브라는 국정과제를 자신있게 선언하고 나서는 배경에는 SK바이오사이언스(302440), 삼성바이오로직스(207940), 녹십자(006280) 등 국내 제약사들이 잇달아 모더나, 아스트라제네카, 노바백스, 스푸트니크V, 전염병대비혁신연합(CEPI) 등과 백신 위탁생산 계약을 맺은 저력이 자리한다는 평가다.
글로벌하게 인정받는 한국의 백신 제조 기술력을 발판삼아 글로벌 백신허브로 퀀텀점프하는 것도 해볼만하다는 게 정부의 셈법이다. 여기에 지난달 한미정상회담에서 양국이 포괄적인 한미 글로벌 백신 파트너십 구축에 합의한 것도 우리 정부에 자신감을 실어주는 형국이다.
주지하다시피 전 산업을 통틀어 글로벌 위탁생산 국가로는 ‘세계의 공장’이라 불리는 중국이 첫손에 꼽힌다. 위탁생산의 다른 표현인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방식은 자체적으로 핵심 기술력을 확보하지 못한 기업들이 주력하는 분야다. 냉정하게 따져보면 코로나 백신 위탁생산도 결국 우리 기업들이 자체 백신을 개발하지 못한 처지에서 ‘꿩대신 닭’이라고 남이 개발한 백신을 대신 생산하게 된 형국이다.
요컨대 백신허브는 백신주권 실현없이는 언감생심이다. 백신허브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위탁생산이 아닌 자체 백신개발에 정부의 모든 지원정책이 집중되어야 하는 이유다. 하지만 정부는 여전히 국내 업체들의 백신개발에 대해서는 ‘언발의 오줌누기’ 수준의 안이한 지원정책을 고집하고 있다. 정부가 올해 코로나19 백신 임상 지원예산으로 고작 687억을 책정한 게 대표적이다.
그나마 최근 정부는 백신주권의 중요성을 뒤늦게 자각하고 백신의 임상2상 결과가 좋게 나온 기업에 대해 백신을 선구매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이미 실기(失期)를 했다는 게 업계의 하소연이다. 진작부터 실탄이 부족해진 국내 백신개발업체들은 정부지원에 대한 기대는 접고 자력갱생에 나서는 모습이다. 실제 백신개발에 있어 가장 앞서는 것으로 평가받는 제넥신은 수천억원이 들것으로 예상되는 백신 임상3상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전환사채 발행을 추진하고 있다.
백신주권 확보를 통한 백신허브라는 목표를 달성하려면 무엇보다 백신개발 제약사들에게 실탄을 충분하게 선지급하는 것이 가장 시급하다. 백신개발 전투 현장에서 실탄이 떨어져 패색이 짙어가는 상황에서 ‘허울뿐인 독려’는 도움은 커녕 사기만 떨어뜨릴 뿐이다. 지금이라도 정부는 코로나백신 임상2상을 진행하는 기업들 가운데 성공 가능성이 높은 기업들을 선별해서 파격적인 조건으로 대량의 백신을 선구매하는 결단을 내릴 때다. 지금도 늦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