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원희 법무법인 디엘지 대표변호사] 2024년 12월 대한민국의 ‘법’은 만신창이가 됐다. 모두가 법을 따른다고 하지만 해석은 제각각이고 집행에도 공정은 없다. 법이 법률전문가들에 의해 조리돌림을 당하고 있다. 이제는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헌법적 가치가 여전히 존재하는지도 모르겠다. 21세기 현대 법치주의 국가에서 무법과 탈법의 퀴퀴함이 진동하고 있다.
법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해 왔다. 전통이 규범화되기도 하고 종교적 신조가 법이 되기도 했다. 윤리나 도덕 이상으로 공동체가 지켜야 할 무언가로 인식돼 왔다. 법이 성문화된 것은 기원전 2100년께 우르남무(Ur-Nammu) 법전이 처음이다. 잘 알려진 282개조의 함무라비 법전은 그로부터 3세기 더 지나 제정됐다. 법은 이후 점점 더 복잡해졌지만 공동체가 질서를 유지하고 안전하게 운영되도록 기능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법을 통해 갈등을 해결하고 그 사회가 지향하는 정의를 실현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우리가 ‘법’이라고 하면 느끼는 보편적 규범성이나 객관성은 이러한 연원에 기인한다.
그러나 작금의 대한민국에서의 법은 보편성보다는 ‘권력’에 가깝다. 정의롭고 평등해야 하는 사회이니 ‘권력’이라는 금칙어 대신 ‘법’이라는 순화된 용어를 사용할 뿐이다. 내가 법을 더 잘 지키고 있다고 싸우고 있는 속내를 들여다보면 그건 내 권한이고 내가 결정할 일이라는 말이다. 공정하고 정의로워야 할 법이 권력의 도구로 전락하고 있다. 분명 법이 강조되고는 있는데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전혀 법적이지 않다.
우리가 자주 들어온 법치주의는 모든 것을 법으로 해결하라는 말이 아니다. 법 만능주의를 의미하지 않는다. 법치주의 사회에서도 ‘법 없이 사는 사람’이 가능한 것은 기본적인 양심과 윤리에 따라 산다면 법에 위반되는 상황이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법이 규범으로서의 보편성을 잃어버린다면 우리 사회에서는 더 이상 법 없이 사는 선량한 사람을 찾기 어려울 것이다. 법을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국가에서 진정한 법치주의를 기대하기는 힘들다. 법은 스스로 중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법이 중립적이게 해야 할 의무가 국가에, 그리고 국민 모두에게 있다.
J R R 톨킨의 소설 ‘반지의 제왕’에는 절대반지가 등장한다. 사우론이 운명의 산에서 자신의 능력까지 녹여내 만들었다는 절대반지. 절대반지의 힘과 유혹은 아주 강력하다. 그런데 소유자를 반드시 타락하게 만든다는 특징이 있다. 절대반지는 파괴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길인데 운명의 산에 있는 불꽃에 의해서만 파괴가 가능하다. 누군가는 유혹을 견뎌 가며 운명의 산까지 절대반지를 가져가야 한다. 대한민국 정치는 현재 절대반지를 쟁탈하기 위한 싸움 중이다. ‘법’으로 가장한 권력의 절대반지. 스스로를 타락하게 만드는 줄도 모르는 채 그 힘과 유혹에 노출돼 있다. ‘법’인 듯 그럴싸한 외형을 가지고 있지만 지향점은 결국 권력이다. ‘법대로 하자’가 예전에는 정의고 공평이었지만 이제는 ‘법만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폭력이 되었다. 누가 절대반지를 운명의 산까지 가지고 갈 것인가.
법은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최후의 보루다. 그래서 법은 누구의 편도 아니며 누구의 편일 수도 없다. 법이 우리 편이라고 생각하는 무리가 있는 사회에서 법은 더 이상 법일 수 없다. 그래서 너도나도 법의 판단을 받겠다며 법정으로 향하는 광경은 전혀 법적이지 않다. 이제 정치를 회복하고 법은 원래의 자리로 가져다 놓자. 법과 정치는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두 개의 바퀴다. 하나가 제 기능을 못 하면 다른 하나도 올바르게 동작할 수 없다. 정치가 법을 남용하지 못하도록 하자. 제발 제대로 된 정치인을 뽑고 이들이 제대로 된 정치를 하도록 하자. 말이 통하고 협치가 이뤄지는 정치가 있을 때 법은 법의 본연의 역할을 다할 것이다. 2024년이 저물어 가는 이 혼란한 시기에 법이 도대체 무엇이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법은 밥이다”라고 답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