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숙 전 국가유산청장] 전설이 사실이 되고 예술이 된다는 말이 있다. 여성국극(女性國劇)에 대한 서술이라 해도 무리가 없겠다. 광복 이후 싹을 틔워 엄혹했던 한국전쟁 시기에 꽃을 피운 뒤 10여 년 불타올랐던 여성국극은 한때 전설이었다. 여성들에게 특히 모질던 그 시련의 시기에 여성들만의 무대를 만든 국극 배우들은 예인(藝人)이자 전사(戰士)로서 한국 여성사에서 독특한 자리를 점한다.
최근 종영한 드라마 ‘정년이’는 그 전설을 사실과 예술로 되살린 불씨가 됐다. 70여 년 전에 요즘 아이돌을 뛰어넘는 인기몰이를 했던 천재 여성국극 배우 정년이는 죽지 않고 살아 돌아와 한 시대 여성사와 예술사를 증언했다. 사라질 수도 있었던 전통 연희 종목 하나가 부활한 것이다.
여성국극은 민중 속에서 우러나온 일종의 노래극이다. 판소리를 바탕으로 했지만 20세기 중반을 사는 사람들이 바라던 욕망과 재미와 꿈을 담았다. 기존 혼성 창극이 따라잡을 수 없는 사실이 있었고 시대를 앞서 가는 정신이 있었으며 희망을 불어넣는 이상이 있었기에 새 예술이 됐다. 요즘 말로 하면 ‘힙’한 신진 장르가 탄생했던 셈이다.
드라마에서 그려진 것처럼 관객의 환호는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 임춘앵(1923~1975)이라는 걸출한 스타를 중심으로 스러져가는 우리 풍류를 되살리려는 노력이 여성들 손에서 신명 넘치게 펼쳐졌다. 모든 남녀 배역을 여성이 도맡아 하며 사회적인 성 정체성을 뛰어넘는 힘이 뿜어져 나왔다. 긴 세월 축적된 민족 미학과 문화유산의 전통 속에 기운생동하고 있었던 심미적 삶의 충동을 여성의 힘으로 되살려냈다.
실낱같은 여성국극의 명맥을 이어온 조영숙 국가무형유산 ‘발탈’ 예능 보유자는 2022년 펴낸 ‘여성국극의 뒤안길-동지사 시대에 관한 증언’에서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를 두 가지로 밝혔다. 첫째는 기왕의 창극, 즉 남녀 혼성 소리극과 비교해서 여성국극의 특징과 창의성이 여전히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아 왜곡과 오류가 심하기에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여성국극을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하도록 당국에 촉구하기 위해서라 했다. ‘뒤안길’이라는 책 제목에 이 두 가지 시대적 염원이 녹아있다.
드라마 ‘정년이’는 여성국극 다시 보기와 재평가를 위한 실마리를 던졌다. 100화가 넘는 원작 웹툰도 좋았지만 그 방대한 서사를 12부 드라마 안에 녹여 넣은 김태리, 신예은, 정은채 등 배우의 호연은 여성국극 1세대와의 연대를 떠올리게 할 만큼 뜨거웠다. 김태리 배우는 이 드라마를 위해 3년 전부터 소리를 배웠고 목포 사투리를 연습했다. ‘정년이’는 이런 젊은 배우들의 노력 덕에 뒤안길에서 걸어 나온 여성국극의 21세기 신세대 판이다.
올해 구순이 된 조영숙 명인은 ‘정년이’가 다시 살려놓은 여성국극의 미래를 위해 남은 여성국극인들이 하나로 단결해 공연을 활성화하자고 말한다. 안산문화예술의전당에 상주 단체로 둥지를 튼 ‘여성국극제작소’는 이런 흐름을 보여주는 대표 단체로 조 명인의 제자인 박수빈과 황지영이 만든 ‘레전드 춘향전’, ‘화인뎐’은 입소문을 타고 관객을 불러 모았다. 세종문화회관 기획 공연 ‘조도깨비 영숙’이 제11회 이데일리 문화대상 국악 부문 수상작이 된 것도 큰 힘이 됐다. 내년 1월 대학로 무대에 오르는 아르코 창작산실 선정작 ‘벼개가 된 사나히’와 개봉 예정인 조영숙 명인 다큐멘터리 등이 여성국극 재발견을 어떻게 이끌어갈지 관심사다.
서연호 고려대 명예교수는 조영숙 명인에게 생생한 체험담을 기록하는 일이 역사를 밝히는 중요한 자료라며 책 쓰기를 권유한 전통 연희 전문가다. 서 명예교수는 이 시점에서 여성국극의 형식을 응용한 현대 작품이 창작돼야 한다고 조언한다. 동시대성 없이 과거의 명성이나 흘러간 옛것에 대한 향수만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전통은 전해서 통해야 문화유산으로 살아 숨 쉰다. 이제 여성국극은 탄생 100년을 바라보며 회생했다. 두 손 모아 염원한다. 여성국극이여, 다시 날아올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