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희 KAIST 기술경영학부 교수는 지난 1일 KAIST 대전 본원에서 가진 이데일리와의 인터뷰에서 이같이 밝혔다.
정부가 역대 정부 중 처음으로 내년 국가연구개발 예산을 줄이겠다고 발표하면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곳은 국가과학기술연구회 소관 25개 출연연구소다.
주요사업비(연구개발 등에 필요한 예산)가 20~30% 삭감됐다. 과학계에 남아 있던 낭비와 비효율적 요소를 없애겠다는 의지로도 볼 수 있지만, PBS 제도 개편 같은 근본적인 대책 없이 숫자만 줄였다는 비판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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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따라 KAIST 등 전국 주요 이공계 학생들은 과학기술분야 R&D 예산 삭감을 재고해달라는 공동성명서를 발표했고, 출연연 과학기술인과 노동조합 등이 참여하는 연대회의가 5일 출범하는 등 과학계 반발이 거세다.
이덕희 교수는 국가 재정을 고려해 불가피하다면 국가 연구개발 예산을 줄여야겠지만 출연연 특성을 고려하면 예산 삭감이 긍정적 효과보다 부정적 효과가 더 크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연구개발은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나올 수 있는데 예산이 삭감되면 연구자의 자유도가 떨어진다”면서 “효율화 취지와 달리 연구자 사기 저하와 연구환경 위축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다만, 그는 정부의 방향처럼 R&D 투자 효율성을 추진하고, 혁신 시스템을 구축하는 부분은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출연연은 1960년대 이후 국가 경제 개발의 원동력으로 중추적인 역할을 하면서 민간 R&D가 발전할 기반을 마련했다. 출연연 스스로 역할 재정립(R&R) 등을 통해 내부 변화도 추진했고, PBS를 도입해 시장경쟁과 자율성을 반영했다.
하지만, 미·중 기술패권 경쟁이나 기후변화와 같은 대내외 환경 변화가 급속도로 진행되면서, 출연연의 혁신이 더 속도감 있게 진행돼야 할 필요성이 커졌다.
이를 위해선 출연연을 비롯한 산학연이 혁신생태계가 돌아가도록 제도나 거버넌스(지배구조) 개편을 통해 연구현장의 분위기를 바꿔야 한다는 게 이덕희 교수 생각이다.
그는 특히 PBS(연구과제중심제도)를 개혁해야 할 대표적인 과제로 꼽았다. 이 교수는 “스스로 원하는 예산을 수주하고, 자율성을 갖고 연구하라는 취지와 달리, 성공 가능성이 큰 연구만 하거나 나홀로 과제에 지나치게 집중하거나 연구과제를 쪼개 시너지를 막는 부작용도 발생했다”고 지적했다.
이와관련, 최근 국회 과학기술방송통신위원회 전체회의에선 변재일 의원(더불어민주당)이 PBS 개혁을 언급하면서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의 경우 원장이 알고 있는 과제가 30%정도 밖에 안된다면서 내부 소통 부재를 지적하기도 했다.
같은 맥락에서 이덕희 교수는 “앞으로 정부 출연연구소들이 유기적으로 연계해 움직이는 걸 장려하는 분위기를 만들고, 산학연이 융합하는 혁신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고 힘줘 말했다. 현장의 기술, 산업 동향이 바로 반영되도록 연구소가 함께 움직여야 제대로 된 연구가 가능하고, 성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우리나라는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과 ‘반도체법’ 발효이후 공급망 재편 과정에서 불확실성 문제에 직면했다”면서 “출연연이 통합 전략을 수립하고, ‘아메바 조직’을 갖춰 국가적으로 필요한 임무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PBS 비중을 줄이면서 국가에 필요한 임무 중심 R&D를 도입하고, 유연한 제도 운용으로 융합 연구가 잘되도록 지원해야 한다”며 “서로 다른 영역 간 융합을 위해 협력하거나 정보를 교류해야 하는데 여전히 장벽이 크다. 정부가 세세하게 개입하기보다는 거대한 물줄기만 바꿔야 한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