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도 개선할 때" Vs "양보 없다"..원윳값 협상 난항

원유가격연동제, 용도별 차등가격제 두고
유업체 "생산비만 연동한 제도 개선해야"
정부, 개선 필요 공감에 차등가격제 제시
낙농가 "사료비 인상 반영 원윳값 올려야"
  • 등록 2022-06-23 오후 4:49:14

    수정 2022-06-23 오후 7:13:11

[이데일리 김범준 기자] 유업계(우유 및 유제품 생산·가공업체)와 낙농가(젖소 사육 및 원유 생산 농가)가 원유(原乳) 가격 산정 체계를 두고 냉전을 이어가면서 올해 원윳값 결정 협상이 난항을 겪고 있다.

▲지난 2월16일 서울 여의도 KDB산업은행 앞에서 낙농업계 관계자들이 ‘농정독재 철폐, 낙농기반 사수 낙농인 결의대회’를 열고 납유거부 불사 투쟁방침을 알리며 몸에 우유를 부어버리고 있다.(사진=연합뉴스)
23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낙농진흥회의 올해 원유 가격 결정이 시한인 오는 24일을 넘길 전망이다. 낙농가(7명)와 유업계(4명), 정부(농림축산식품부), 학계, 소비자단체 등으로 구성된 낙농진흥회 이사회(총 15명)에서 본격 논의조차 시작을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이사회 당연직인 낙농진흥회장도 석 달째 공석인 상태다.

낙농진흥회의 ‘원유생산 및 공급규정’에 따르면 낙농가와 유가공 업체는 통계청의 농축산물생산비조사 발표 이후 1개월 내에 원유기본가격조정협상위원회를 꾸리고 협상을 마쳐야 한다. 통계청은 지난달 24일 2021년 우유 생산비를 전년 대비 4.2%(34원) 증가한 1ℓ당 843원으로 발표했다. 원유기본가격 산출식에 따라 올해 1ℓ당 47~58원 범위에서 가격 인상 요인이 발생한 셈이다.

통계청이 내놓은 우유 생산비 증감률이 ±4% 이상이면 해당 연도에, ±4% 미만이면 2년마다 원유 생산자인 낙농가와 수요자인 유업체가 협상을 통해 가격을 정한다. 양측 합의안이 낙농진흥회 이사회를 통과하면 그해 8월1일부로 조정된 원유가격이 적용되고, 원유를 매입해 흰우유 혹은 치즈·생크림 등 유제품으로 가공 생산하는 유업체들이 잇따라 소비자 판매가격을 조정하는 구조다.

다만 원윳값 결정 시한은 낙농진흥회의 권고 규정 사항일뿐 법적 구속력이 있는 건 아니어서 기한을 넘기더라도 강제로 중재를 하거나 당장 수급 등이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니다. 지난 2020년에는 5월말 1차 위원회를 시작으로 협상이 8차까지 이어졌을 정도로 진통을 겪은 바 있다.

결국 조정된 원유 가격도 지난해 9월부터 유예 적용하면서 그해 8월 공급분부터 리터 당 926원에서 947원으로 21원(2.3%) 올랐다. 지난 2018년 이후 3년 만의 인상으로 이후 지난해 10월부터 서울우유협동조합, 매일유업, 남양유업, 동원F&B, 빙그레 등 주요 유업체들이 줄줄이 우유와 유제품 가격을 평균 4~6%대부터 많게는 10% 넘게 인상했다.

원유 가격을 둘러싼 진통은 매년 거쳤지만, 올해는 유독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낙농진흥회에서 낙농가와 유업체, 정부 등이 논의를 하는 원유기본가격조정협상위원회 구성 자체가 이뤄지지 않고 있으면서다. 생산자 측(낙농가)은 이미 협상위원 추천을 마쳤지만 수요자 측(유업체)이 앞서 두 차례에 걸친 위원 추천 요구에 묵묵부답하고 있는 상황이다.

유업계는 이번 원윳값 결정 논의에 앞서 시장의 기능을 왜곡하는 ‘원유가격연동제’를 변화하는 시장 상황에 맞춰 개선하는 게 먼저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현행 원유가격연동제는 원부재료 등 낙농가의 생산비만 연계돼 있고 실제 소비자들의 우유와 유제품의 수요 등 소비량과 시장 물가는 반영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국내 낙농산업 보호를 위한 일종의 정책적 배려인데 과거와 달리 출산율과 우유 소비가 날로 감소하는 상황에서 이러한 구조가 개선이 이뤄지지 않으면 유업계에선 갈수록 비싸지는 원윳값과 남아도는 재고 처리 부담이 누적된다. 낙농진흥법에 따라 유업체는 낙농가와 연간 1년치 공급량을 미리 한꺼번에 계약하고 계약 농가가 생산한 원유를 의무적으로 전량 사줘야 한다.

낙농진흥회 ‘2021 낙농통계연감’을 보면 국내 연간 우유 공급량(국내생산+수입, 원유 환산 기준)은 지난 2011년 361만4463t에서 최근 2020년 452만2421t까지 매년 꾸준히 늘며 10년 새 약 25.1% 증가했다. 반면 같은 기간 수요(국내소비+수출량)는 359만5996t에서 447만173t으로 매년 공급량을 밑돌며 약 24.3% 증가에 그쳤다. 1인당 원유 소비가능량 역시 2015년 76.1㎏에서 2020년 85.8㎏로 연 평균 2.4% 증가율에 머물렀다. 그러다 보니 원유 재고량이 많을 경우 연간 25만t 넘게 쌓이기도 한다.

한국유가공협회 관계자는 “생산비만 연동한 원유가격연동제로 원유 가격은 계속 오르고 출산율 감소 등으로 국내 우유 수요가 줄면 공급을 줄여야 하는데 쿼터제(수량 할당)에 막혀 유업계가 이중고를 겪고 있다”며 “변화하는 시장 상황에 맞춰 이제는 제도 개선이 필요하고, 용도별 차등가격제도 적극 도입해 탈지분유 등 가공유 제품은 가격 경쟁력을 갖춰 값싼 해외 수입제품과 경쟁하며 물가 안정을 도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용도별 차등가격제’는 지난해 농식품부가 소비자, 생산자(낙농가), 수요자(유업체), 전문가 등으로 구성한 낙농산업발전위원회 논의를 통해 나온 개념이다. 낙농산업발전위는 소비자 물가 안정을 위해 우윳값 인상 주요 원인으로 꼽히는 생산비 연동제 개편도 추진하고 있다.

이에 대해 낙농가는 전면 반발하고 나서면서 협의는 좀처럼 진행되지 않는 상황이다. 낙농가는 제도 개선에 대해서는 ‘한 치의 양보도 없다’는 입장과 함께 최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 여파에 따른 사료와 건초류 가격이 30% 이상 급등하는 등 생산비 증가에 따라 올해도 원윳값 인상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대립각이 첨예해지면서 올해 원유 가격 결정을 위한 논의가 시작도 못한 채 내홍만 짙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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