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이 세계에 기록한 5·18광주…그의 `회복` 메시지에 주목

노벨상 시상식 사흘 전 스웨덴서 강연
강연문 '빛과 실' 통해 작품 세계 회고
8세때 쓴 시 낭목 "내 질문은 사랑이었다"
“광주, 인간잔혹성·존엄 보통명사, 현재형”
질문들 견디며, 계속 쓸 것, 나아갈 것
  • 등록 2024-12-09 오전 6:01:00

    수정 2024-12-09 오전 6:18:15

[이데일리 김미경 기자] ‘고통’은 열 두 차례, ‘폭력’이란 단어는 열 번이나 등장했다.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한강이 7일(현지시간) 지난 31년간의 집필 인생 회고에서다.

한강은 이날 스웨덴 한림원에서 열린 노벨상 수상자 강연에서 ‘빛과 실’이라는 제목의 연설문을 낭독했다. 그는 소설 ‘채식주의자’(창비)에서 최신작인 ‘작별하지 않는다’(문학동네)에 이르기까지 소설을 쓰면서 마주했던 생각들과 자신의 문학을 이루고 있는 내밀한 질문들을 청중과 나눴다.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어째서 세계는 폭력과 아름다움이 동시에 공존하는가. 한강은 이 질문이 오랫동안 그의 글쓰기를 이끌어 온 힘이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최근 몇 년 사이에 그 믿음이 흔들렸다”고도 했다. “내 모든 질문은 결국 사랑을 향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소설가 한강이 7일(현지시간) 스웨덴 한림원에서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자 강연’을 하고 있다.(사진=로이터/연합뉴스).
관통 키워드는 “삶과 죽음, 폭력과 사랑”

‘사랑이란 어디 있을까? / 팔딱팔딱 뛰는 나의 가슴 속에 있지. // 사랑이란 무얼까? / 우리의 가슴과 가슴 사이를 연결해주는 금실이지.’

연설은 1979년 여덟 살 때 쓴 시(詩)를 우연히 발견한 일화에서 시작했다. 그는 “지난해 1월 이사를 위해 창고를 정리하다 낡은 구두 상자가 나왔다”며 “그 여덟 살 아이가 사용한 단어 몇 개가 지금의 나와 연결되어 있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14년이 흘러 22살이 되던 해 그는 “쓰는 사람”이 됐고, 5년 뒤에 첫 장편소설 ‘검은 사슴’(1998·문학동네)을 발표했다.

한강은 장편소설을 쓸 때마다 질문 안에 살면서 “질문들의 끝에 다다를 때” 소설을 완성하게 된다고 회고했다. 그는 인간의 폭력과 사랑, 삶과 죽음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이 도미노처럼 이어지며 새 작품으로 나아갔다.

그의 질문은 5·18 광주민주화운동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소년이 온다’(2014)를 집필하면서 정점에 달했다. 한강은 광주 망월동 묘지를 다녀온 뒤 “정면으로 광주를 다루는 소설을 쓰겠다고 결심했다”며 “그곳에서 학살이 벌어졌을 때 나는 아홉 살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광주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긴 역사를 두고 자행됐던 학살의 기록을 샅샅이 살폈다. 한강의 대표작 ‘소년이 온다’는 이렇게 탄생했다. 노벨위원회가 1순위로 꼽은 작품은 역사의 한 가운데 선 개인의 고통과 내면을 섬세하게 그렸다.

한강은 이렇게 말했다. “인간의 잔혹성과 존엄함이 극한의 형태로 동시에 존재했던 시공간을 광주라고 부를 때 광주는 더 이상 한 도시를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가 된다는 것을 나는 이 책을 쓰는 동안 알게 됐다. 시간과 공간을 건너 계속해서 우리에게 되돌아오는 현재형이다.”

지금까지 쓴 책들을 뒤로 하고 앞으로 더 나아가겠다는 다짐도 밝혔다. 자신을 ‘쓰는 사람’으로 명명한 한강 작가는 “아직 나는 다음의 소설을 완성하지 못하고 있다”며 “어쨌든 나는 느린 속도로나마 계속 쓸 것”이라고 말했다.

강연 말미에 한강은 “내가 느끼는 그 생생한 감각들을 전류처럼 문장들에 불어넣으려 하고, 그 전류가 읽는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것을 느낄 때면 놀라고 감동한다”면서 “언어가 우리를 잇는 실이라는 것을 실감한다. 그 실에 연결되어 주었고, 연결되어 줄 모든 분들에게 마음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고 끝맺음했다.

강연은 이미 한 달여 전부터 표가 매진됐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강연이 끝난 뒤엔 청중들의 사인 요청이 이어지면서 한강은 예정된 시간보다 30분가량 늦게 자리를 떠났다.
소설가 한강이 7일(현지시간) 스웨덴 스톡홀름 한림원에서 ‘빛과 실’이란 제목으로 강연하고 있다. 한국시간으로 8일 새벽 1시부터 약 30분 간 한국어로 진행된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 기념 강연은 노벨위원회 유튜브를 통해 전세계에 생중계됐다. (사진=AP/연합뉴스).
“한강 문학, 尹계엄 속 사유와 메시지 되어줄 것”

이토록 절묘할 수 있을까. 지난 3일 밤 한국에서 전격 발표된 계엄령은 한강의 31년간 이어온 작품 속 주제와 연결된다. 작가의 문학은 늘 억압과 폭력, 그리고 그로부터의 회복이라는 주제 중심에 있다.

김성신 평론가는 “한강의 주요 작품들은 우리 현대사의 폭력과 상처에 관한 이야기”라며 “작품들은 모두 일관되게 ‘회복’을 말한다”고 말했다. 다만 “한강이 말하는 것은 ‘청산’이 아니다. 상처를 응시하고, 보듬어 진정한 회복을 해내야만 한다는 것이 일관된 메시지”라면서 “그래야만 희망이 있지 않느냐고 한강의 문학은 인류 전체에게 묻는다”고 부연했다. 이어 “한강의 문학은 지금 대한민국과 민주주의가 가야 할 방향을 묻는 국민들에게 더욱 필요한 사유와 메시지가 됐다”고 평가했다.

김 평론가는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그가 기록한 한국의 현대사는 세계문명사에 영원히 기록됐다”면서 “인류 전체의 기억을 뒤집을 수 있는 힘은 없다. 이번 노벨문학상 수상을 계기로 문학이 가진 힘을 두려워할 만큼의 성숙을 기대한다”고 강조했다.

한강은 노벨 주간(12월 6~12일) 동안 이어지는 다채로운 행사에 참석한다. 노벨문학상 시상식은 오는 10일 스톡홀름 콘서트홀에서 열린다.

한편 지난 6일 회견이 열린 노벨박물관 앞에선 비상계엄 사태와 관련해 윤석열 대통령의 처벌을 요구하는 1인 시위가 열리기도 했다. 한국인으로 추정되는 시위자는 “윤석열을 내란죄로 체포하자”라는 문구가 적힌 포스터를 들었고 노벨상을 취재하러 온 세계 언론의 이목을 끌었다.

우리나라 최초, 아시아 여성 작가 중 처음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가 6일(현지시간) 스톡홀름 스웨덴 아카데미(스웨덴 한림원)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뉴스1).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한강 작가가 6일(현지시간) 스웨덴 스톡홀름 노벨상박물관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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