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율 쇼크에 비명…산업계 "내년 전략·계획 수립 엄두도 못 내"(종합)

'힌남노 직격탄·노조 리스크' 철강 압박 가중
항공, 달러화 차입 비중 축소에도…'역부족'
가전·반도체 "고환율 수혜, 옛말…업황 악화"
식음료·면세도 직격탄…"허리띠 졸라맬 수밖에"
"고환율·경기 침체 등 여파 지켜봐야" 보수적 경영기조
  • 등록 2022-09-22 오후 5:29:33

    수정 2022-09-22 오후 5:32:16

[이데일리 이준기 신민준 박민 이다원 남궁민관 기자] “하늘길이 뚫리며 기대감이 컸는데 환율 폭등에 다시 망연자실하고 있습니다.”(항공사 관계자) “대규모 설비투자를 진행하는 상황에서 고환율은 우리에게 큰 숙제를 안겨줬습니다.”(반도체업계 관계자)

환율 쇼크가 산업계를 강타하는 모양새다. 22일 13년 만에 원·달러 환율이 1400원을 돌파하면서 항공·철강·가전·유통 등 각 업계 여기저기서 곡소리가 나오고 있다. ‘고환율→가격 경쟁력 상승→수출 호조’라는 통념은 깨진 지 오래다. 원자재를 들여와 완제품을 파는 식으로 우리 수출 구조가 바뀌고 있는 데다 인플레이션 및 그에 따른 금리인상 여파에 경기침체 공포가 엄습하면서 수출 증가 자체를 기대하기 어려워서다. 고환율이 지속할 경우 가뜩이나 적자를 기록 중인 무역수지는 더욱 악화할 수밖에 없다. 일각에선 원자재값 폭등에 고환율에 따른 수입 가격 상승까지 겹치며 수출을 많이 할수록 흑자 폭이 줄어드는 악순환의 고리에 갇히는 것 아니냐는 우려마저 나온다. 기업들이 내년도 경영 전략·투자 계획 수립은커녕, 올 4분기 계획도 전면 재수정에 나선 이유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기준금리를 0.75%포인트 인상하는 등 ‘매파(금리인상 선호)’ 기조를 이어가자 원·달러 환율이 1400원 선을 돌파한 가운데 22일 오전 서울 중구 하나은행 딜링룸에서 직원들이 업무를 보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철강·항공업계 ‘직격탄’…전자·반도체업계도 ‘비상’

이미 태풍 힌남노 피해를 고스란히 본 철강업계의 상황은 최악이다. 통상 철강재 수출을 통해 벌어들인 외화로 철광석과 제철용 연료탄 등 원재료를 구매하는 방식의 ‘내추럴 헤지’로 환율 변동에 대응하고 있지만, 국내 철강재 수급에 빨간불이 켜지면서 고환율 방어수단인 ‘해외 판매 비중’을 줄여야 하기 때문이다. 국내 조강(제강공정에서 나온 강철 덩어리) 생산량의 35%를 담당하는 포항제철소 완전 정상화까지는 3개월가량 소요될 것으로 포스코 측은 포고 있다. 이로 인한 수급난 차질에 환율 방어까지 무너지면 국내에서 유통되는 철강재 가격은 크게 오를 수밖에 없다. 최근 노동조합의 파업 압박을 받고 있는 현대제철 상황도 심각하다. 파업이 현실화할 경우 자동차와 조선소, 건설업계 등 전·후방 산업 전반에 미칠 파장은 어마어마하다.

석유화학사들도 수익성 악화가 불가피하다. 기초 원료로 쓰이는 납사(나프타)의 수입 가격이 오르는 탓이다. “나프타를 대체할 연료로 액화석유가스(LPG) 사용 비중을 늘리고 스페셜티(고부가가치) 사업 다각화 등 포트폴리오 다변화를 추진하고 있다”(업계 관계자)고 하지만, 수익을 온전히 방어하기에는 역부족이다.

항공사들 상황도 마찬가지다. 리스료와 유류비 등 대부분 고정비용을 달러로 지급하는 만큼 환율 상승에 따른 지출은 늘어나게 된다. 외화평가손익도 발생해 재무구조 악화도 불가피하다. 업계 1위인 대한항공의 경우 올해 2분기 기준 순외화부채가 약 35억달러(약 4조7200억원)로 환율이 10원 오르면 약 350억원의 외화평가손실이 발생한다. 더 나아가 환율 상승은 해외여행 심리도 위축시킨다. 원화 고정금리 차입 확대 추진, 원화·엔화 등으로의 차입 통화 다변화 등을 추진하고 있으나 신통치 않다.

가전·반도체업계의 경우 그간 외화평가이익, 매출 증대 효과 등 고환율 수혜를 입기도 했으나 이제는 상황이 반전됐다. 높은 환율 변동성에 따른 대외경제 위축은 소비심리를 떨어뜨리고 결국 업황 악화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반도체업계 관계자는 “최근 원자잿값이나 반도체 장비 가격 등이 오르면서 환차익은 옛말이 됐다”며 “사실상 중립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했다. 가전업계 관계자는 “경기침체가 가시화할 경우 소비자들은 TV도, 냉장고도 바꾸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원자재 수입 의존이 높은 식음료 업계, 달러를 기준으로 제품을 판매하는 면세업계 등 유통가 곳곳에서도 신음이 흘러나온다. 음료업체 한 관계자는 “생산 원가 부담은 이중, 삼중으로 올라가는데 수출 이득은 없으니 타 제조업 대비 타격은 훨씬 크다”며 “소비자 가격을 마냥 올리기는 어려우니 영업, 마케팅, 인력 등에서 허리띠를 졸라매는 것뿐”이라고 했다. 면세업계 관계자는 “‘환율 보상 프로모션’ 등 할인 혜택을 통해 시중가 대비 저렴한 가격을 유지하고 있지만 소비자들이 면세소비 자체를 줄여버릴 경우 이 역시 무용지물”이라고 했다.

서울 시내 대형마트 식용유 판매대에서 시민들이 장을 보고 있다.(사진=연합뉴스)
“당장 4분기 전략·계획 전면 재수정…내년 엄두도 못 내”

예전 같으면 기업들은 한창 내년도 경영전략. 투자 및 사업 계획을 수립해야 시점이지만, 환율이 1500원대를 넘어설 것이란 전망까지 나오는 등 불확실성이 커지자 우왕좌왕하는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뾰족한 대응 방안이 없다 보니 그나마 비용 절감을 최우선으로 이익감소 폭을 줄이는 데 주력해야 한다고 토로할 정도다. 일단 기업들은 내년 경영전략의 초점을 ‘내실 강화·속도 조절’ 등 보수적으로 맞추고 있다. 고환율과 경기 침체, 이로 인한 업황 둔화 등의 여파를 지켜보며 대응 수위를 유연하게 가져가겠다는 얘기다. 산업계의 한 관계자는 “당장 올 4분기 계획부터 다시 짜고 있다”며 “내년 계획 수립은 엄두도 못 내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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