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붕 성균관대 기계공학부 교수]새해를 기쁨으로 맞이해야 하건만 우리 국민의 마음은 참담하다. 안 그래도 어수선한 정국으로 나라 꼴이 왜 이러나 모두 걱정이었는데 여객기 추락 참사까지 일어나니 그야말로 모두의 가슴이 미어지는 아픔으로 새해를 맞이했다. 지나온 역사를 돌이켜보면 우리는 참 암울한 시대를 곱이곱이 어렵지만 잘 넘겨왔다. 군사독재와 민주세력의 충돌로 최루탄 매운 가스가 한시도 가실 날 없던 1980년대도 묵묵히 버텨내며 성장해 왔고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사태가 일어나 이제는 정말 나라가 망했구나 했던 순간에도 놀라운 금 모으기 운동을 기점으로 빠르게 다시 선진국의 트랙에 재진입할 수 있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도 이제 나락으로 갈 것이라는 기사가 넘쳐났지만 꿋꿋하게 잘 버티며 1인당 국민소득이 3만5000달러가 넘는 선진국으로 당당히 진입할 수 있었다.
세계은행이 2024년 8월 발간한 ‘세계개발보고서: 중진국의 함정’에 따르면 전 세계 1인당 소득수준 1100달러에서 1만3000달러 정도의 중간 소득 국가는 무려 108개에 이르며 세계 인구 중 3/4이 이 국가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지난 30년간 이 중진국의 함정을 벗어나 국민소득 3만달러 이상의 고소득 국가로 성장한 나라는 인구 1000만 명 이상을 기준으로 했을 때 우리나라와 대만뿐이라고 한다. 미국의 시사주간지 US뉴스 앤드 월드리포트가 매년 집계하는 세계 강대국 순위에도 2021년 8위에 올라 10대 강국에 진입하더니 2022~2024년 3년간은 무려 6위를 기록했다. 이 강대국들의 목록을 보면 미국, 중국, 러시아, 영국, 독일, 일본, 프랑스 등인데 모두 세계 1차대전 주요 참전국들이다. 지난 120년간 그 어떤 후진국도 이 막강한 강대국 명단에 이름을 올린 국가는 없다. 사피엔스 종족의 120년 현대 역사에 말도 안 되는 기적을 대한민국이라는 존재감 없던 나라가 당당히 만들어낸 것이다.
세계은행 보고서는 이러한 기적의 원동력이 무엇인지를 세세히 분석해 놓았다. 발전이 필요한 시기마다 훌륭한 정치지도자가 있었고 독재정치를 벗어나 포용력 있는 민주주의 체계를 정착시킨 것도 큰 장점으로 평가받았다. 기업가 정신이 투철한 리더들의 등장도 더 할 수 없이 중요한 요소였다. 중진국 대부분은 어느 정도 성장에 이르면 빈부격차가 심해지면서 정치적으로 갈등이 발생하고 동시에 관료를 비롯한 사회 시스템이 부패하면서 선진국 수준의 사회에 이르지 못하게 되고 결국 첨단기술에 기반한 산업사회로의 진입에 실패했다는 것이다. 보고서를 읽다 보니 우리가 지난 30년간 겪어온 모든 심각한 사회문제와 위기가 다 포함돼 있다. 아니, 이래서 다른 국가들은 모두 중진국의 함정에 빠졌다는데 도대체 우리는 그 모든 문제를 겪으면서 어떻게 기적 같은 성장을 이룰 수 있었을까 몹시 궁금해졌다. 그런데 딱 한 가지 분명히 다른 것이 드러났다. 바로 보통 사람들이 지닌 성공에 대한 열정이었다.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고등학교 진학률이 이미 1980년에 70%에 이르렀고 대학 진학률이 30%를 넘었는데 이것이 가장 큰 차이였다고 한다. 중진국 대부분은 고교 진학률이 30%에 그쳤다. 한국의 경우 2024년에는 대학진학률이 70%를 넘어섰으니 전 세계 최고의 교육열이라고 할 만하다. 이 보통 국민의 교육열은 세계 최고 수준의 반도체, 조선, 자동차, 가전, 방위산업 등 첨단산업을 일군 에너지가 됐다. 첨단 산업 없이 선진국이 된 국가는 없다. 대한민국 기적의 주인공은 보통 사람들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작은 부품 하나라도 더 잘 만들어 선진국을 이겨보겠다며 공부하고 도전해서 이뤄낸 열정의 성과물이다. 이제 다시 기적의 주인공, 보통 사람들이 뛰어야 할 시기가 왔다.
2025년은 고통스러운 국난의 시기이자 글로벌하게는 인공지능(AI) 혁명의 시기다. 세계 문명은 AI 시대로 치닫고 있고 생성형 AI, AI 반도체, 자율주행차량, 드론, 휴머노이드 로봇 등 혁신적 신기술과 신산업이 엄청난 자본을 바탕으로 4차 산업혁명을 현실로 이끄는 중이다. 안타깝게도 혁명의 시기 우리나라 대장기업 삼성전자를 비롯한 중추적 기간산업들이 모두 어려움을 겪고 있고 이를 반영하듯 우리나라 주식 시장도 1년 내내 밑으로, 밑으로 곤두박질쳤다. 이 정도면 국난이 맞다.
2024년 삼성전자 주가가 떨어지자 난리가 났다. 거의 모든 매체에서 삼성전자의 문제점이 조직 탓이다, MZ세대 탓이다, 리더십 탓이다, 기술 개발에 소홀했다 등등 수천 개의 분석기사를 쏟아냈다. 그런데 이상하게 실적을 보면 결코 나쁘지 않다. 3분기 매출은 전년 대비 7% 성장하며 사상 최고 실적을 냈고 이익도 9조 1800억원으로 꽤 괜찮은 편이었다. 그런데 경영진이 반성문을 썼다. 자본이 가장 중시하는 AI 분야에 대해 실력을 보여주지 못했고 경쟁기업인 TSMC나 혁신기업인 엔비디아에 비해 준비가 미흡했다며 죄송하다고 했다. 그러면 그렇게 삼성의 잘못을 쪼아대던 우리 사회, 우리 조직, 또 개개인은 칭찬받을 만했을까. 우선 올해 나는 사상 최대 실적에 전년 대비 7% 성장했는가. 그만큼 지난 1년 열심히 살아냈는가. 그렇다고 치자. 그럼 AI 시대에 대한 준비는 잘해 왔는가. 잘못했으면 지적질 대신 마음속으로 반성이라도 해봤는가. 우리나라 정치인들한테도 묻고 싶다. 지난 1년 진짜 국민을 위해 그렇게 열심히 살았느냐, 전년 대비 7% 국민의 삶을 좀 좋게 만드었느냐고. AI 혁명기를 대비하는 것도 진짜 주 52시간 규제만 있으면 괜찮은 거냐고, AI 공부는 많이 하셨느냐고, 정말 가슴 치며 묻고 싶다.
혼돈과 혁명의 시기, 어차피 희망은 우리 국민, 보통 사람들이다. 군사 독재로 암울하던 1980년대, 우리는 민주화 투쟁에 앞장섰던 사람들만 있었던 게 아니라 반도체 세계 1위, 조선업 세계 1위, 자동차 세계 1위를 꿈꾸며 밤새워 공부하던 보통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 모든 보통 사람들이 협력해 만든 120년 만의 기적으로 우리는 세계가 부러워하는 민주국가, 첨단산업이 가득한 선진국가를 이뤄낼 수 있었다. 2025년에도 희망은 대한민국 보통 사람, 바로 당신뿐이다. 묵묵히 이 땅을 지키며 열심히 살아온 당신이 진정한 영웅이다. 암울한 2025년의 시작이지만 영웅이 성장하는 또 한 번의 역사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