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불안'을 통해 연대를 말한다

사라지는 건 여자들뿐이거든요
강화길 외│268쪽│은행나무
  • 등록 2020-07-29 오전 5:35:10

    수정 2020-07-29 오전 5:35:10

[이데일리 김은비 기자] “누군가는 벤치에 앉아 밤새 울었다. 누군가는 조깅하듯 도랑을 뛰어다녔다. 누군가는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누군가는 누군가를 찾아 밖으로 나갔다. 누군가는 누군가를 찾아왔다. …효정은 모른 체했다. 여자들은 그 점을 못 견뎌했다. 왜 아무것도 묻지 않는지. 그런 여자들은 곧 하은사에서 사라졌다. 여자가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여자의 증발을 모두가 안도했다. 이상한 여자, 거짓말하던 여자, 헛소리하던 여자로 취급됐다.”

2015년 서울 강남역 살인사건부터 최근 N번방 사건까지 일련의 사건들을 거치며 여성의 삶 한가운데는 ‘불안’이라는 감각이 자리했다. 불안은 생명을 위협하는 사건, 혐오와 사회적 압박 외에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제한 등에서도 비롯한다. 이때 불안은 세대를 거쳐 많은 여성들이 겪은 공통의 경험이 중첩된 것으로 개인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공통의 경험이 곧바로 연대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강화길 △손보미 △임솔아 △지혜 △천희란 △ 최영건 △최진영 △허희정 등 한국문학에서 주목받고 있는 젊은 여성 소설가 8명이 테마소설집으로 뭉쳤다. 이들은 2020년을 살아가는 여성의 불안을 ‘고딕 스릴러’라는 장르를 통해 다양한 시공간에서 형상화했다. 고딕 스릴러는 특정 공간이나 관계에서 불안을 매개로 인간의 심리를 세밀히 파헤치는 장르 소설이다.

여덟 편의 서로 다른 소설들에서 두드러지는 특징은 여성 인물의 불안이 자의로든 타의로든 다른 여성을 겨누고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강화길의 ‘산책’은 죽음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화자로 삼아 불안을 직간접적인 죽음의 경험과 연결시켜 풀어낸다. 심령의 것 같은 목소리는 ‘나’와 어머니 그리고 어머니의 친구 ‘종숙 언니’와 종숙 언니의 어머니에 이르는 세 세대에 걸친 여성이 서로에게 불안을 전이시키는 과정을 서술한다.

최진영의 ‘피스’에서는 자매의 엄마 오필남이 체중이나 혼전 임신 등을 두 딸에게 예언하며 심리적 압박을 가한다. 오필남의 입을 빌려 저자가 내뱉는 말은 오랜 시간 동안 여성에게 강요된 사회의 규제를 닮았다. 한편으로는 여성을 통해 규제를 전달함으로써 교묘하게 착취의 구조를 은폐한다.

다른 여성을 이용하는 여성도 등장한다. 임솔아의 ‘단영’에서는 비구니 효정이 주지로 있는 사찰 ‘하은사’의 풍경을 그려낸다. 사람들이 여성 주지인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은 기도나 설교가 아니라는 것을 파악한 효정은 신도들에게 장아찌나 입시 발원문을 판매하며 절의 수익을 꾀한다. 절에 온 여성들 중 일부는 그것을 견디지 못하고 불안을 토로하지만 효정은 이를 모른 체한다.

이런 서사가 단순히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구도로 이해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한 세대의 여성에서 다른 세대의 여성에게 이어지는 언어 속에 은폐된 촘촘한 심리적 착취의 매커니즘을 이해하는 것이다. 불안의 중첩은 반복과 세대감을 통해 재현하는 수난사의 표현이고, 사라져왔던 여성들을 구현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다. 한 예로 허희정의 ‘숲속 작은 집 창가에’에서는 기묘한 숲을 찾아온 여성들이 반복적으로 실종되는 모티브로 세상 속에서 희미하게 존재하는 여성들을 조명한다.

각각의 소설은 이 시대에 사라지지 않은 여성의 궤적을 독자들에게 문학적으로 남긴다. 소설 속 비현실적 목소리, 유령, 환각 등은 소설이 끝날 때까지 그 실체가 드러나지 않는다. 그것은 결국 누군가 이전에 여기 남았다는 신호로 분열과 불안 속 혼자가 아님을 전한다. 그리고 미약하게나마, 불균형하고 불합리한 방식으로나마 연대의 가능성이 된다. 강지희 문학평론가는 추천사에서 “소외된 자들의 외로움은 지독하게 이어지지만 그 고립이 정확하게 이해되는 순간에 어떤 연대가 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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