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권일 신라문화연구원 선임연구원은 전국 각지에서 모인 150여 명의 사람들에게 당부했다. 신라의 고도 경주에서 발굴 중인 이름도 붙여지지 않은 무덤 앞이었다. 1000여 년 전 신라시대 금동신발을 비롯해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이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50여 명은 취재진, 100여 명은 일반 시민들이었다. 이들의 발굴현장 방문을 위해 발굴조사 기관은 유물이 훼손되지 않게 촘촘히 이동 동선을 짜고 그 위에 모래 주머니를 깔아 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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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신발은 발굴조사 초기 단계인 만큼 흙속에 묻힌 채로 윗부분 일부만 볼 수 있었다. 오랜 세월을 증명하듯 금동 신발은 푸르스름하게 녹슬어 있었다. 금동은 화려하긴 하겠지만 신축성, 쿠션감 등을 기대할 수 없는 재질이다. 굳이 이를 소재로 신발을 만든 이유가 있을지, 이 신발의 주인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사연이 있을지 여러 궁금증을 떠올리게 했다. 김 선임연구원은 “금동신발은 일반적으로 왕족·귀족 등 최상위계급의 무덤에서 나오는 중요한 유물이다”며 “성별에 따라 다르고 아직 조사 초기 단계라 정확히 알 수는 없다”고 조심스레 말했다.
머리 부분에서는 금동으로 된 달개(금관에 매단 장식)가 여러 점 발견됐다. 김 선임연구원은 “아직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금동관 일부분이거나 금동관 장식으로 추정하고 있다”며 “추가로 발견되는 유물조합을 통해서 피장자의 신분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 옆으로는 곳곳에 금이 가고 깨진 각종 토기류와 가마솥이 쌓여 있었다. 무덤 가운데는 아직 발굴이 이뤄지지 않은 상태였고 측면만 파여 있었다.
황남동 120호분은 일제강점기에 번호만 부여받고 방치돼 있었다. 민가 조성으로 훼손돼 고분의 존재조차 확인할 수 없는 상태였다고 했다. 김 선임연구원이 보여준 1957년 경주 일대 위성사진에는 해당 지역에 초가집 3동이 있었다.
이번 발굴조사에서 특이한 점은 무덤이 마사토(화강암이 풍화해 생긴 모래)를 사용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모래의 일종인 마사토로 봉분을 쌓을 경우 흘러내릴 위험이 있기 때문에 고대 무덤에서는 사용된 경우를 그 동안 볼 수 없었다. 김 선임연구원은 “신라 적석목곽묘(신라전기 시대 무덤양식) 중 마사토로 지은 무덤이 확인된 건 이번이 처음”이라며 “왜 무덤에 이런 흙을 사용했고 어떻게 축조를 했는지 추가로 연구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김 선임연구원은 “120호분·120-1호분·120-2호분 등 3개 고분은 신라 고분의 성격 및 매장 의례 등 많은 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