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구텐베르크보다 78년이나 앞선 1377년 세계 최초 금속활자를 발명해 ‘직지심체요절’을 펴냈다. 서양과 같은 혁명은 없었지만 금속활자는 조선 초기 왕권을 안정시키고 유학을 전파하며 백성에게 꼭 필요한 정보를 전파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지난 17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 고서 전문 사설 박물관인 화봉 책 박물관은 ‘한국과 세계의 고활자 컬렉션’이라는 이름으로 소장하고 있는 고활자 80여점을 공개했다. 여승구 화봉 책 박물관 관장은 조선 최초의 금속활자인 ‘계미자’로 찍은 ‘동래선생교종북사상절’ 일부를 이번 컬렉션의 백미로 꼽았다. 계미자는 태종 3년인 1403년 만들어진 조선 최초의 동활자로 그 해의 간지를 붙여 ‘계미자’라는 이름이 붙었다. 계미자가 나온 시기도 구텐베르크보다 50년 앞선다.
이에 태종은 1403년 2월 고려 말의 서적원제도를 본받아 주자소를 설치하고 금속활자를 제작했다. 활자를 만들기 위해서는 엄청난 양의 동철(銅鐵)이 필요한데 당시만 해도 철은 몹시 귀했다. 태종은 부족한 동철 수급을 위해 왕실의 재정이나 물품을 맡아보던 관청인 내부(內府)의 것을 모두 내놓았다. 또 종친·훈신 등의 신하들에게도 자진 공출하게 했고 소요경비는 임금이 개인적으로 내탕금(內帑金)을 내놓아 활자주조에 착수했다.
계미자로 찍어낸 책은 13~14종 정도인 것으로 전해진다. ‘사서삼경’이나 ‘주자책’같은 유학 이념을 담은 책이 주를 이뤘지만 꼭 필요한 농서, 의서, 법서 등의 책도 있었다. 장원연 청주 고인쇄박물관 학예사는 “통치와 관련된 유학 서적뿐만 아니라 백성들이 아픈곳을 치료하고 억울함이 없도록 하는 책들을 찍어내 국가로서 꼭 해야 하는 역할을 태종 때가 돼서야 시작했던 것”이라고 평가했다. 계미자는 세종 2년인 1420년 경자자를 주조하기까지 18년 동안 사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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