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김은비 기자] 태조 이성계(1335~1408)는 고려를 멸하고 조선을 건국한 지 3년 뒤인 1395년 ‘천상열차분야지도각석’이라는 천문도를 제작하게 했다. 가로 123㎝·세로 211㎝ 크기의 커다란 대리석에 새겨넣은 천문도는 600여년 전에 만들어졌다는 것이 놀라울 정도로 정밀하다. 맨눈으로 볼 수 있는 대부분의 별 1467개를 넣은 천상열차분야지도는 중국 남송의 ‘순우천문도’에 이어 전천(전체 하늘) 천문도 중 2번째로 빨리 만들어졌다. 조선 초기 만들어진 이 천문도는 우리나라의 빼어난 천문 과학력을 증명한다.
국립고궁박물관은 지난 19일 개관 20주년을 기념해 조선 역사를 대표하는 유물 100종을 온라인으로 공개했다. 이 중에는 ‘천상열차분야지도각석’, ‘앙부일구’, ‘간평일구’, ‘혼개일구’ 등 조선시대 천문학의 뛰어난 수준을 증명하는 유물들이 다수 포함됐다. 조선시대 왕들은 과학분야 중에서도 왜 유독 천문학에 관심을 가졌던 걸까.
| 태조가 제작한 천문도 ‘천상열차분야지도각석’(사진=국립고궁박물관) |
|
조선 초기 새롭게 확립된 국가 기틀 위에서 민생안정과 부국강병을 위해 역대 왕들은 여러 기술 개발에 노력을 기울였다. 그중 천문학은 특히 제왕의 학문이라 여겨졌다. 하늘의 변화를 알아야 농사를 잘 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 천문 관측 능력은 곧 주요 통치 덕목으로 꼽혔다. 실제 선조는 1604년 초신성 폭발 등 기상이변이 잇따르자 “내 부덕한 자질로…아래서는 백성들이 원망하고 위에서는 하늘이 노하여 하늘 견책을 보이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라며 자책했다. 또 당시 새 왕조가 하늘의 뜻에 의해 세워졌다는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서도 천문학 연구가 필수적이었다.
세종시대(1418~1450)에 조선의 천문학은 정점에 이르렀다. 세종은 천문관측 기관 천문관을 서운관에서 관상감으로 바꾸고 각종 천문관측기기를 제작했다. 궁궐 밖의 백성들을 위해서 해시계인 ‘앙부일구’를 만들었다. 전통적으로 해시계는 평지에 시각의 눈금을 그려 넣고 그 위에 막대기를 세워서 막대기의 해 그림자가 비추는 시각의 눈금을 읽어 시간을 측정했다. 형태도 다양하게 변화해 휴대용으로도 개량됐다.
농사와 직결된 강우량을 측정하기 위해서 측우기와 수표를 제작했다. 측우기는 구리로 만든 둥근 원통에 강우를 받아 그 양을 측정하는 기구로 그 원리는 매우 단순했다. 그러나 인류 역사에서 강우량을 정량적으로 측정한 최초의 사건으로 그 역사적 의의는 매우 컸다. 세종은 측우기를 제작한 후 한성과 대도시 지역에 보급하고 1년간 강우량을 측정해 매년 초 중앙정부에 보고하도록 했다. 조선실록에 이런 기록이 남아 있는데 이는 세계적으로도 귀중한 기상학 기록이다. 수표는 한강과 청계천에 설치해 비가 온 후 하천의 수위를 측정하는 기구다. 측우기와 마찬가지로 가뭄과 홍수에 현명하게 대처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 조선 세종때 제작된 ‘앙부일구’(사진=국립고궁박물관) |
|
세종은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천문학적 현상을 시간 단위로 정리해 생활에 적용할 수 있도록 한 자체 역법 ‘칠정산’(七政算)도 개발했다. 조선은 건국 후 고려 때 사용하던 역법인 대통력(大統曆)을 그대로 이어받아 사용했다. 대통력은 중국 명나라의 역법으로 만든 지 200여 년이 지나 오차도 컸다. 천문 관측과 계산의 기준도 중국의 수도 베이징이었다. 따라서 독립된 국가를 건국한 조선으로서는 독자적인 역법의 정비가 절실했다.
정밀한 천문 관측을 위해 세종은 ‘간의’를 제작하기도 했다. 간의를 이용하면 모든 천체들의 위치를 측정할 수 있었다. 태양은 물론이고 별의 관측을 이용해 시간도 잴 수 있었다. 세종은 경회루에 설치한 간의에 매일 밤 5명의 천문 관원이 숙직하면서 천문현상을 관측하도록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