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김은비 기자] 조선 제4대 국왕으로 영토를 넓히고, 인재를 두루 등용하는 등 여러 업적을 남겨 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하다는 칭송을 받는 세종대왕(재위 1418~1450). 세종의 수많은 업적 중에서도 단연 최고로 꼽히는 것은 훈민정음 창제다. 세종은 그 훈민정음으로 왕비를 향한 마음을 담은 노래의 가사를 썼다. 오는 9일 한글날을 앞두고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신국보보물전’에서 전시하고 있는 국보 제320호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이 그것이다.
| 국보 제320호 월인천강지곡 일부(사진=국립중앙박물관) |
|
‘월인천강지곡’은 부처님의 자비가 달빛처럼 모든 중생을 비춘다는 뜻으로 석가의 탄생부터 성장과정, 불도를 깨우치기까지 등 일생을 담은 찬불가로 알려져 있다. 또 하나의 사실은 ‘월인천강지곡’은 세종이 왕비 소헌왕후(1395~1446)가 승하하자 그 명복을 빌기 위해 직접 한글로 지은 찬가라는 것이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가장 빠른 시기에 지어진 가사라는 점도 의미가 있다.
조선시대 왕족이 승하하면 이를 기리기 위해 불가를 제작한 것은 종종 있었던 일이다. 하지만 세종의 경우 소헌왕후를 잃은 슬픔이 더 컸던 것으로 보인다. 세종실록에 “임금이 만년에 지병이 겹쳐 고생한 데다 두 아들(광평대군·평원대군)이 잇달아 죽고 여기에 소헌왕후(부인)마저 승하하여 임금의 마음이 기댈 곳이 없었다”는 기록이 이를 보여준다.
왕가의 실록 등에 따르면 1446년(세종 28) 승하한 소헌왕후 심씨는 평소 성품이 자애롭고 기강이 엄정해 내명부(궁궐 여성의 조직체계)의 귀감이 될 정도였다. 일례로 1426년(세종 8년) 한양에 큰 불이 났을 때에는 사냥 겸 군사훈련을 참관하기 위해 지방에 간 세종과 세자 문종을 대신해 왕후가 화재 진압을 진두지휘 했다. 세종이 왕후의 내조 덕에 성군이 될 수 있었다는 평가도 있을 정도다.
세종이 직접 지은 만큼 ‘월인천강지곡’은 문자와 문장 측면에서 가장 정확하게 훈민정음의 방식을 활용하고 있다. 훈민정음의 제자 원리, 음운 법칙, 음절 구성, 낱말 조성 등이 거의 그대로 반영돼 있다. 이는 ‘용비어천가’보다 더욱 한글 창제의 이념을 잘 드러낸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 한글 표기에서도 동시기의 문헌들과 다소 차이를 보인다. 보통 당시의 문헌들은 한자를 큰 글자로 먼저 쓰고 한글음을 작게 쓰는 방식을 취했다. ‘월강천강지곡’은 이와 달리 한글을 먼저 큰 글자로 표기하고 한자를 작게 표기했다. 일반적으로 한글음을 한자 보다 앞세운 표기는 조선 말 개화기에 가서야 나타나기 시작했다.
첫 번째 한글 금속활자로 간행됐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책의 간행에 사용된 활자는 1434년(세종 16)에 초주한 갑인소자와 1447년(세종29)에 주조한 ‘월인석’ 한글자로서 조선시대의 활자 인쇄술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