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계인이 손뗐나…인텔 몰락 주목해야 하는 이유[생생확대경]

'세계 최초' 수식어 인텔
표준 자리매김 마이크로프로세서, 최고 '효자'
PC 황금기 취해 모바일 혁명 외면
눈앞의 이익에 급급 미래 좌우할 R&D 축소
혁신 게을리한 대가는 몰락…반도체 업계 타산지석 삼아야
  • 등록 2024-10-09 오후 3:59:35

    수정 2024-10-15 오후 10:18:40

[이데일리 양지윤 기자] “외계인을 잡아다가 고문해 반도체 칩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한때 반도체 업계에선 이 회사의 직원이 지구밖 생명체가 아니냐는 우스갯소리가 돌았다고 한다. 외계인이 아니고선 도저히 나오기 힘든 압도적인 기술력을 보이다 보니 놀라움과 부러움이 뒤섞인 평가가 나왔던 걸로 보인다. 주인공은 바로 ‘세계 최초’라는 수식어가 항상 따라다녔던 인텔이다.

인텔 로고. (사진=AFP)
지금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사업 매각설이 끊이지 않을 정도로 이빨 빠진 종이 호랑이로 전락했지만, 인텔에도 빛나던 레전드(전설) 시절이 있었다. 인텔은 집적회로를 개발한 로버트 노이스와 ‘무어의 법칙’으로 잘 알려진 고든 무어가 1968년 공동창업한 회사다. 1971년 세계 최초로 상업용 마이크로프로세서인 ‘인텔 4004’를 출시한데 이어 7년 뒤인 1978년 또 다시 세상을 놀라게 할 기술을 선보였다. 16비트 중앙처리장치(CPU)인 ‘8086’ 프로세서를 출시, 당시 PC 분야 대명사로 여겨지던 IBM PC의 표준 CPU로 탑재됐다. 이듬해 ‘8088’ 마이크로프로세서까지 출시하며 개인용 컴퓨터를 의미하는 퍼스널컴퓨터(PC)의 시대를 본격적으로 열었다.

인텔의 도전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993년에 PC용 펜티엄 CPU를 생산하면서 반도체 업계 매출 1위로 등극한 뒤 24년간 왕좌를 굳건히 지켰다. 펜티엄은 ‘다섯’을 뜻하는 라틴어 ‘펜타(penta)’와 ‘인텔’을 뜻하는 ‘아이(i)’, 그리고 광물의 이름 뒤에 붙는 ‘~움(um)’을 합성한 인텔의 CPU 브랜드다. 하나의 칩에 2개의 프로세싱 유닛을 탑재한 CPU로, 구조적으로 두 배 이상 명령을 수행할 수 있는 마이크로프로세서다. 인텔을 독보적인 1위 CPU 기업으로 올려놓은 최고 ‘효자’ 제품이다.

‘인텔 인사이드’라는 슬로건도 인텔의 화려한 이력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말이다. PC와 노트북마다 이 슬로건이 붙어 있던 스티커는 전자제품에 인텔의 반도체가 들어가 있다는 의미로, 일종의 품질 보증서나 다름 없었다. 인텔은 마이크로소프트(MS)와 ‘윈텔(윈도우+인텔) 동맹’을 맺고 인텔 인사이드 마케팅으로 2000년대 중반까지 PC와 서버용 CPU 시장의 황제로 군림해왔다. 1992년부터 2016년까지 무려 24년간 세계 반도체기업 매출 1위를 지키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인텔 제국의 몰락은 결코 하루 아침에 이뤄진 게 아니다. 지난 2006년 스티브 잡스 애플 최고경영자(CEO)는 당시 폴 오텔리니 인텔 CEO를 찾아가 휴대용 PC용 반도체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인텔이 내놓은 답변은 ‘거절’. 휴대용 PC 생산 규모가 작아 이윤을 크게 남기기 힘들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오텔리니 CEO가 퇴짜를 놓은 기기는 모바일 혁명을 이끈 ‘아이폰’이다. 모바일로 변화하는 시장 흐름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 것도 뼈 아팠지만, 더 치명적인 실수도 저질렀다. 2005년부터 2021년까지 영업·마케팅·재무통 출신들이 사령탑을 맡으면서 기술기업(IT)의 심장과 같은 연구개발(R&D)을 초토화시키는 자해 행위를 했다. 당장 눈앞의 이익에만 급급해 투자비를 줄이고, 인력을 축소한 결과는 처참했다. 서버용 CPU 시장에서 한때 90%가 넘던 시장 점유율은 후발 주자인 AMD에 추격당하며 70%대로 미끄러졌고, 인공지능(AI) 핵심인 그래픽처리장치(GPU) 시장에선 엔비디아에 밀려 존재감을 잃었다. 1등이라는 자만심에 도취해 ‘혁신’을 게을리한 결과다.

노키아, 모토로라. 코닥. 한때 초격차 기술을 기반으로 일류기업의 반열에 올랐다가 시장에서 소리소문없이 사라진 기업들이다. 인텔 역시 혁신을 게을리한 대가로 창업 이후 최대 위기에 빠지며 까딱하다간 이들 기업들처럼 도태될 상황에 처했다. ‘오늘의 1등이 내일의 1등’이라는 보장이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는 본보기다.

특히 반도체 업계의 ‘넘사벽’(넘을 수 없는 4차원의 벽) 인텔의 몰락은 한국에 주는 시사점이 크다. 한국 경제가 반도체 수출 실적에 따라 실물경기의 좋고 나쁨이 결정되는 구조인 만큼 결코 가볍게 봐선 안 된다. 인텔의 위기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국내 반도체 업계에서 혁신의 불씨가 꺼져가고 있는 건 아닌지 점검에 나서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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