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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장영은 기자] “그녀는 겨우 17살이었을 때,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중국의 위안소로 끌려가 매일 여러 명의 일본군에게 강간당한 경위를 소름 끼치게 자세하게 묘사했다.”
역사가 기록하는 것으로 시작된다면 기억은 역사를 완성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을까. 외신이 24년전에 세상을 떠난 고(故) 김학순 할머니의 부고 기사를 크게 실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중 처음으로 공개 증언을 한 김 할머니를 통해 참혹한 역사를 직시하고 피해자들의 아픔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취지일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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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할머니 부고기사 통해 위안부 문제 재조명
미국 유력 일간지 뉴욕타임스(NYT)는 25일(현지시간)자 신문 부고면 절반 가량을 할애해 김학순 할머니에 대한 기사를 다뤘다. 1997년 12월 폐 질환으로 김 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지 24년 만이다.
이 시리즈는 NYT가 1851년 이후 제대로 보도하지 못한 부고 기사를 늦게나마 다룸으로써 그들의 삶을 주목하고 기억하자는 의도로 기획했다. 지난 2018년 3월에는 이 기획을 통해 유관순 열사를 추모했다.
기사는 1991년 8월14일 김 할머니가 위안부 증언을 위해 처음으로 TV 카메라 앞에 섰던 장면으로 시작한다. NYT는 “‘전 위안부 여성’이라는 그녀의 타이틀은 일본의 많은 정치 지도자들이 수십년간 부인해왔고 지금도 부인하고 있는 역사를 똑바로 마주 보게 했다”고 강조했다.
김 할머니는 당시 명백한 강압과 폭력의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수치심 탓에 숨어 있어야 했던 전시 성폭력 피해 여성들을 목소리를 처음으로 대변한 것이다. 김 할머니의 증언은 다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을 이끌어 냈을뿐 아니라, 성착취를 당한 세계 각국의 피해자들에게도 오래 남을 유산이 됐다고 NYT는 평가했다.
진심어린 사과와 배상 원했지만 소원 못 이뤄
김 할머니의 최초 공개 기자회견 이후 1992년부터 일본 대사관 앞에서 수요일마다 집회가 열렸고, 쏟아지는 증언과 비난 속에 견디지 못한 일본 정부는 1993년 역사적인 사과문을 발표했다. 당시 일본측은 일본군이 “직간접적으로 위안소를 설치하고 운영하는 데 관여했다”며 위안부 동원에 “강압적”인 수단을 사용했다는 점을 인정했다. 일부 사실만을 인정했지만 김 할머니의 용기 있는 증언이 이끌어낸 역사의 한 발자국이었다.
한일 관계를 전공한 역사학자 알렉시스 더든 미 코네티컷대 교수는 NYT와의 인터뷰에서 “김 할머니는 20세기의 가장 용감한 인물 중 하나”라며 “그녀의 진술은 주장을 뒷받침할 문서 증거를 찾아내도록 유도했고, 이것은 유엔이 전쟁 범죄와 반인륜 범죄로 규정하고 있는 것에 대해 일본 정부에 책임을 묻는 시발점이 됐다”고 말했다.
기사는 말미에 김 할머니가 생전에 한 마지막 인터뷰를 재조명했다. 김 할머니는 온라인매체인 뉴스타파와의 인터뷰에서 “필요하다면 110살이나 120살까지 살려고 한다”며 “그들의 진심 어린 사과를 듣는 것 외에 바라는 것이 없다”라고 말했다. 김 할머니는 생전에 지치지 않고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법적인 책임과 배상금을 요구했으나 생전에 끝내 소원을 이루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