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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미의 미디어아트] NFT와 미디어아트의 만남, 가치를 더욱 빛내주다
- ‘대체 불가능한 토큰’이라는 뜻으로 희소성을 갖는 디지털 자산을 대표하는 토큰인 NFT.[이데일리 고규대 기자] 최근 몇 년간 미디어아트 시장은 급성장했다. 캔버스를 벗어난 벽이나 바닥 등 다양한 공간을 도화지로 사용하는 미디어아트가 관심을 끌고 있다. 미디어아트는 메타버스와 NFT의 기술적 성장과 더불어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다. 이번 연재로 미디어아트를 가까이 접할 수 있는 전시 공간과 그 공간 속 작가들의 이야기를 다뤄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미디어아트는 매체를 활용한 예술이다. 디지털 매체를 사용해 제작되는 회화, 조각, 사진, 설치미술 등을 포괄한다.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고전 명화가 디지털 매체를 통해 미디어아트로 재탄생했을 때, 기존의 작품보다도 더 눈길을 사로잡는다. 꽃이나 나무, 나비 같은 소재가 작품 안에서 가만히 있지 않고 움직인다. 관람객들은 작품과 상호작용하는 간접 경험을 겪으며 미디어아트에 한층 더 빠져든다. 문화예술진흥법 제9조에 의하면, 1만㎥ 이상 건축물을 신·증축할 때는 건축 비용의 1% 이하 범위에서 회화, 조각 등 미술 작품을 설치하거나 그 비용의 70%를 문화예술진흥기금으로 출연해야 한다. 1972년 법 제정 당시에는 권장 사항이었다가 1995년부터 의무화된 건축물 미술작품 제도에 따라서다. 일명 ‘1% 법’이다. 이 법에 따라 1만㎥ 이상의 건축물에는 대개 대형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다. 미디어아트가 계속 인기를 끌게 된다면 머지않아 미디어아트 설치물들을 우리 주변의 1만㎥ 이상의 건축물에서 보게 될 날이 올지 모른다. 미디어아트의 장점은 무엇일까? 무엇보다 간편한 운송과 보관이다. 실물이 있는 미술 작품의 경우 작품 운송이나 설치에 있어서 운송료나 보험료가 부과되고 절차도 복잡하다. 반면에 미디어아트는 컴퓨터 파일로 USB 하나만 있으면 간단히 이동이 가능하다. 빔프로젝터나 스크린만 설치되어 있으면 손쉽게 미디어아트 작품을 설치할 수 있다. 여러 장소에도 동시다발적으로 작품을 선보일 수 있다. 이러한 편의적인 장점이 있지만, 취약점과 한계도 있다. 실물을 지닌 회화나 조각 같은 미술품과 달리 파일로 존재한다는 점 때문에 복사 문제로 저작권 보호에 취약하다. 그래서 미디어아트 관리는 더 철저히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제 4차 산업혁명의 기술인 블록체인을 활용한 NFT(Non Fungible Token·난 펀저블 토큰)의 등장으로 미디어아트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제 가치를 지킬 수 있게 되었다. 미디어아트의 가치를 더욱 빛내주는 NFT와의 만남에 대해 알아보자.200년 전통을 지닌 영어사전 출판사 영국 콜린스는 한 해 동안 파급력이 컸던 사회적 이슈를 반영해 ‘올해의 단어’를 뽑는다. 콜린스가 뽑은 2021년 올해의 단어는 ‘메타버스’(Metaverse), ‘크립토’(Krypto) 등을 제치고 ‘NFT’가 선정되었다.◇NFT의 개념200년 전통을 지닌 영어사전 출판사 영국 콜린스는 한 해 동안 파급력이 컸던 사회적 이슈를 반영해 ‘올해의 단어’를 선정한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전 세계가 팬데믹 상황을 겪었던 2020년 콜린스가 뽑은 올해의 단어는 ‘록다운’(Lockdown)이었다. 가히 시의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콜린스가 주목한 2021년 올해의 단어는 무엇일까? 가상과 현실이 융합된 공간인 ‘메타버스’(Metaverse)와 암호화폐인 ‘크립토’(Krypto) 등을 제치고 ‘NFT’가 선정되었다. NFT는 그만큼 ‘핫’한 단어였다. 그렇다면 NFT는 무엇일까? NFT는 ‘대체 불가능한 토큰’이라는 뜻으로 희소성을 갖는 디지털 자산을 대표하는 토큰이다. 비트코인 같은 가상화폐는 현실 화폐처럼 누구나 통용할 수 있어 대체나 일대일 교환이 가능하지만, NFT는 각각의 디지털 자산이 고유한 인식 값을 갖고 있어 대체 불가능하다. 이는 마치 예술품과 비슷한 특성이다. 가로 50cm, 세로 50cm의 같은 회화 작품이 2점이 있을 때 그 안에 그려진 작품의 내용은 서로 다르다. 그렇기에 각각 다른 작품 가격이 매겨진다. NFT에 입력된 값은 바로 이 내용과도 같다. 반 고흐가 그린 그림과 일반인이 그린 그림의 크기가 같아도 작품 가격은 하늘과 땅 차이인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NFT는 자산 소유권을 명확히 함으로써 미술품을 비롯한 게임, 음악, 스포츠, 부동산 등의 기존 자산을 디지털 토큰화하는 수단으로 쓰인다. NFT로 만든 장콸의 ‘미라지 캣 3’는 2억 5000만원에 판매되었다.(사진=서울옥션블루)◇NFT와 미디어아트의 만남NFT와 미디어아트의 만남으로 미디어아트의 가치는 왜 빛나게 될까? NFT가 부여하는 희소성이 미디어아트에 적용될 경우, 복제를 막고 원본이 하나 있는 미술 작품처럼 가치를 높여주기 때문이다. 미술사적으로 가치를 인정받아 높은 가격대를 형성한 예술품들의 특징은 대개 원작 한 점인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예술품은 프랑스 파리에 있는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16세기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모나리자’이다. 2021년 기준으로 ‘모나리자’의 순 가치는 우리 돈으로 약 1조 340억 원이 넘을 거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전 지구상에 유일한 단 한 점이기 때문이다. 만일 모나리자가 한 점이 아니라 여러 점이었다면? 그 개수만큼 가치가 줄어들었을 거다.판화, 사진, 조각 같은 작품은 에디션이 존재한다. 여러 번 인화할 수 있는 판화나 사진 같은 경우 작가가 한정판 수량으로 제한하고 희소성을 높이기 위해 일부러 5개, 10개, 20개 등으로 제작 개수를 제한한다. 조각에도 에디션이 있는데, 일부 독자들에게는 다소 생소할 수 있다. 그래서 이해를 돕기 위해 예를 들자면 가장 유명한 조각의 하나인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은 무려 30~40점의 에디션이 있다. 이 작품은 로댕의 살아생전과 사후에 제작한 것, 석고와 청동 등으로 재질이 다른 것, 크기를 달리한 것, 제작 연도가 다른 것 등 다양한 에디션이 있다.미디어아트 또한 여러 점의 복제가 가능하기에 한 점이 아니라 에디션을 두면서 제작한다. 이때 미디어아트가 NFT화된다면, 희소성을 갖게 되고 복제로부터 저작권을 안전히 지킬 수 있게 된다. 미디어아트의 한 종류인 컴퓨터 아트가 등장하면서, 예술 작품의 ‘비물질화’가 도입되었다. 예술 작품이 실물로 존재해야 한다는 생각은 더는 낡은 관념이 되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보면 미디어아트는 불법 복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컴퓨터 파일로 존재하는 만큼 손쉽게 복제되기에 저작권 지키기에 취약했다. 그러나 NFT의 등장으로 미디어아트는 하나의 원본처럼 판매와 구매가 가능해진 것이다.“NFT로 발행된 미디어아트가 물질적인 실체가 없는데 왜 수억 원, 수십억 원이나 하냐?”라는 말은 잘못된 것이다. 김선우 작가의 ‘도도새’ 작품 가격은 1억 원, 장콸 작가의 ‘미라지 캣3’ 작품 가격은 2억 5천만 원, 일론 머스크의 아내인 그라임스의 작품 가격은 무려 65억 원에 팔렸다. NFT로 발행되면서 복제를 막고 희소성을 인정받았기에 판매가 이루어진 것이다. 세계적으로 미디어아트를 주도하는 팀랩의 미디아아트 전시 전경.(사진=팀랩 홈페이지)◇ 저작권 지키는 NFT로 미디어아트는 활황기를 맞아미디어아트는 2000년대 이후 미술의 한 분야로서 그 위치와 자리를 확고히 잡았다. 특히 인터넷의 확산으로 시공간을 뛰어넘을 수 있는 미디어아트의 장점이 발휘되었다. 미디어아트는 기술로 인한 진입장벽으로 소수의 전유물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미디어아트를 작업하는 예술가들이 늘어나면서 작품 수량이 늘어난 점도 미디어아트의 확산에 한몫했다. 팬데믹 이후에 메타버스 같은 디지털 세계로의 전환에 있어 미디어아트는 이를 가장 잘 담아내는 예술이기도 하다. 이런 시대 상황과 맞았기에 미술의 주류로 떠오른 것이다.다만 제4차 산업혁명의 기술인 NFT가 등장하기 전까지 미디어아트는 판매나 소장 등에 있어서 저작권 보호를 받지 못했다. 저작권은 창작물을 만든 이가 자기 저작물에 대해 가지는 배타적인 법적 권리이다. 저작권이 보호받지 못하면, 창작에 대한 대가가 지급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는 창작자의 권리와 생태계를 파괴하게 되어 결국 창작물이 줄어들게 되고 질도 낮아지게 된다. 작품을 팔아 생존하는 예술가의 삶도 위협받게 된다. ‘가난한 예술가가 진정한 예술을 한다’라는 말은 폐기되어야 하는 낡은 용어다.미디어아트는 아무리 작품성이 있어도 복제로 인해 판매되기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소장 가치가 낮다는 문제가 있었다. 소장 가치는 자기의 것으로 간직할 만한 가치로 희귀성이 있거나 한정판 등으로 소수의 사람만 소장이 가능할 때 더 올라가게 된다. 대량 생산해서 누구나 구매가 가능한 작품은 소장 가치가 낮아진다. 예술품이 아닌 공산품과 다름없기 때문이다.저작권에 대해 달라진 분위기와 NFT의 등장으로 미디어아트는 판매와 소장이 더 용이해지면서 현대미술에서 당당히 그 역할을 다해가고 있다. 저작권 인식이 상향된 계기는 문학 작품, 논문, 강연, 작곡, 연극, 영화, 춤, 그림, 조각, 건축, 사진, 지도, 컴퓨터 프로그램 등 창작물의 영향력이 더욱 증대되면서 이를 만들어내는 창작자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법과 제도적인 규정이 늘어난 것으로 볼 수 있다. 기존에 없던 다양한 직업이 생겨났듯 창작자들의 숫자 또한 늘어난 것도 한몫한다. 여기에다 기성세대와는 다르게 MZ 세대들은 물건을 구매하듯 창작물에 돈을 주고 구입하는 걸 태어날 때부터 경험하면서 자연스럽게 여긴다. 넷플릭스, 디즈니 플러스 같은 OTT 서비스가 운영될 수 있는 기반은 구독료를 지불하는 시청자들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날개를 달아주는 NFT와의 만남으로 미디어아트는 앞으로도 현대미술의 주요한 장르로서 확고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디지털 기술을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미디어아티스트들이여, NFT 또한 마음껏 주무르고 요리하길!△ 글=이상미 프랑스 파리 고등미술연구원 예술경영학과에서 수학했고, 파리 고등실천연구원에서 서양예술사학과 고고학으로 석사 학위, 파리 고등사회과학연구원에서 미학으로 박사과정을 밟았다. 이상아트(주) 대표이사이자 유럽문화예술콘텐츠연구소장으로도 활동 중이다. 미술계 현장에서 활발한 활동과 함께 이론과 실무를 겸비한 전문성을 갖고 있다.
- [이상미의 미디어아트] 국내 사립 미디어아트 전시장 살펴보기
- 빛의 벙커 전시장 전경.(사진=빛의 벙커)[이데일리 고규대 기자] 최근 몇 년간 미디어아트 시장은 급성장했다. 캔버스를 벗어난 벽이나 바닥 등 다양한 공간을 도화지로 사용하는 미디어아트가 관심을 끌고 있다. 미디어아트는 메타버스와 NFT의 기술적 성장과 더불어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다. 이번 연재로 미디어아트를 가까이 접할 수 있는 전시 공간과 그 공간 속 작가들의 이야기를 다뤄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미디어아트가 일상의 공간으로 스며들었다. 서울 시민이 많이 찾는 서울 광화문광장은 오후 8시마다 미디어아트 전시장으로 탈바꿈하기도 한다. 최근 재개장한 광화문에 미디어파사드가 새롭게 선보였다. 미디어 파사드는 ‘미디어’(Media)와 건축물 외면의 가장 중심을 가리키는 ‘파사드’(Facade)의 합성어다. 건물 내·외부 벽면을 스크린 삼아 LED 조명을 비춰 영상을 표현하는 기법이다. 세종문화회관의 전면인 체임버홀 벽면에 길이 44m, 높이 11m의 대형 와이드 파사드가,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우측 벽면에는 길이 13m, 높이 11m의 대형 와이드 파사드가 설치되었다. 모두 빔프로젝터를 투사하는 방식이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외벽의 광화 벽화와 세종문화회관 앞의 해치마당 진입부에는 길이 53m, 높이 최대 3.25m의 대형 LED 패널 미디어월이 설치되었다. 밝기는 5만 안시(ANSI)로 세계 최고 수준의 사양이다. 세종문화회관 외벽에는 이이남, 이경동, 유민하, 서의정, 박윤주 등의 작가가 미디어 파사드 영상을 9월 15일까지 전시했다. 리모델링 중인 KT 광화문 WEST사옥에는 공사 가림막을 설치해 초대형 스크린이 된다. KT 사옥 외벽에서의 전시는 1년간 진행된다. 이로써 일상에서 미디어아트를 더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다.미디어아트는 사립 전시장에서 어떻게 첫발을 내딛게 되었을까? 민간에서는 한국 최초의 미디어아트센터이자 디지털아트 전문기관인 아트센터 나비가 1999년 개관했다. 20년 넘게 국제적인 미디어아트의 허브로 운영되고 있다. 아트센터 나비는 해외의 미디어아트를 알림과 동시에 국내의 미디어 작가들을 발굴했다. 심포지엄과 워크숍 등으로 다양한 미디어아트 활동을 펼쳤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일상과 미디어, 미디어와 예술, 일상에서 미디어아트에 익숙해질 수 있었다.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은 아트센터 나비의 핵심 미션에 대해 “최신 기술을 비판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며, 창작을 지원해 새로운 가능성을 품고 있는 창의적 표현을 키우고, 참신한 아이디어가 공유되며 새로운 사회적 운동의 원동력으로 삼을 수 있는 커뮤니티를 구축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오늘날 우리가 접할 수 있는 민간 전시장은 비교적 최근인 2018년 이후로 생겼다. 빛의 벙커, 아르떼뮤지엄, 노형 슈퍼마켙, 뮤지엄 원 등 사립이 운영하는 미디어아트 전시장의 현주소를 알아보자. 이 중 3곳은 제주도에 있다. 제주도는 관광 산업으로 특화된 지역이기에 미디어아트 전시와 맞아 떨어진 점도 있다. 빛의 벙커 전시장 전경.(사진=빛의 벙커)◇ 프랑스 몰입형 미디어아트 전시관, 빛의 벙커‘빛의 벙커’(Bunker de Lumieres)는 옛 국가기간 통신 시설이었던 오래된 벙커를 프랑스 몰입형 미디어아트 전시관으로 개조해 만든 공간이다. 프랑스 유명 화가들의 작품을 디지털 기술에 담아 만든 몰입형 미디어아트는 2012년 프랑스에서 첫선을 보였다. 프랑스 레보드 프로방스의 ‘빛의 채석장’, 파리 ‘빛의 아틀리에’에서만 볼 수 있었던 전시를 프랑스 이외 국가에서는 최초로 한국의 제주도에서 구현해 낸 것이 빛의 벙커이다. 빛의 벙커가 있던 장소는 한국과 일본 사이에 구축한 해저 광케이블을 관리하기 위해 1990년에 국가 기간 통신 시설로 준공한 비밀 벙커가 있었다. 2012년까지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다가 2013년 벙커의 역할이 사라지면서 민영화되어 다양한 공연과 전시장으로 활용되었다. ㈜티모넷은 2015년부터 전시 공간을 찾기 위해 전국 답사를 하다가 2017년 이 공간을 찾았다. 벙커는 철거, 내부 공사, 콘텐츠 제작 및 사업 마케팅 준비를 진행한 지 1년 만인 2018년 11월 16일 ‘클림트’ 개관전을 열었다. 이곳은 1층 단층 건물로 가로 100m, 세로 50m, 높이 10m, 내부 높이 5.5m 정도다. 축구장 절반 정도 크기인 약 2,975㎡(900평)이다. 내부에는 넓이 1m²(0.3평)의 기둥 27개가 나란히 있어 깊이감을 한층 더해주는 구조로 설계되어 있다. 서양 명화로 구성된 상설 전시실과 국내 근현대 및 전통미술로 구성된 기획전시 등 2개 공간을 갖췄다. 전기·통신·수도·소방 등 여러 기반 시설이 잘 갖춰져 있는 데다 자연 공기 순환 방식을 이용해 연중 16도 내외의 쾌적한 온도를 유지한다. 원래 벙커로 설계되었던 만큼, 외부의 빛과 소리가 완전히 차단되어 방음이 완벽해서 관람객이 전시를 관람하는 데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빛의 벙커는 개장 이후 3년 만에 200만 명 이상의 관람객을 모으며 몰입형 미디어아트 전시장으로 화제가 되었다. ㈜티모넷은 빛의 벙커 성공에 힘입어 1963년 현대적인 무대 시설을 갖춘 최초의 극장으로 개관한 워커힐 대극장을 개조해 2022년 몰입형 전시 공간인 ‘빛의 시어터’를 열었다. 빛의 벙커, 빛의 시어터 둘 다 유휴 공간을 미디어아트 전시장으로 활용해 도시 재생의 일환으로 재탄생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 아르떼뮤지엄 전시장 전경.(사진=아르떼뮤지엄)◇ 전 세계로 확장하는 아르떼뮤지엄‘아르떼뮤지엄’(ARTE MUSEUM)은 ㈜디스트릭트코리아가 운영하는 몰입형 미디어아트 상설 전시관이다. 2020년 9월 아르떼뮤지엄 제주를 시작으로 2021년 8월 전남 여수, 12월 강원 강릉에서 각각 문을 열었다. 영원한 자연(Eternal Nature)을 주제로 자연 속 소재의 작품을 각 지역의 특색과 문화유산에 맞게 미디어아트로 전시한다. 제주는 ‘아일랜드’(Island), 여수는 ‘오션’(Ocean), 강릉은 ‘밸리’(Valley)를 주요 콘셉트로 한다. 아르떼뮤지엄 제주는 과거 스피커 제조 공장으로 사용되던 공간을 몰입형 미디어아트 전시관으로 개조했다. 규모는 약 4,628㎡(1,400평), 최대 높이 10m로 미디어아트 전시장에 알맞은 웅장한 공간이다. 이곳에서는 해변, 파도, 폭포, 꽃, 달, 숲 등 11개의 전시 공간으로 다양한 미디어아트를 경험할 수 있다. 아르떼뮤지엄은 작품과 관람객 사이의 거리를 없애고 관람객의 몰입감을 한껏 높이기 위해 아나몰픽, 퍼스펙티브 뷰, 프로젝션 매핑, 홀로그램, AR(증강현실), VR(가상현실) 등 다양한 디지털 미디어 기술을 동원했다.아르떼뮤지엄 부산은 2023년 상반기 개관을 앞두고 있다. 이곳에서는 국내 최초로 NFT 기반의 크립토 아트 전시관인 ‘아르떼 메타’를 선보일 예정이다. 디스트릭트코리아는 아르떼뮤지엄을 2025년까지 싱가포르 등을 포함해 세계 각 도시에 30여 개점으로 확장할 계획이다. 디스트릭트코리아는 올해 홍콩 지점을 열고, 중국 청두에서 개관하는 계획도 세워놨다. 2023년 상반기에는 미국 라스베이거스와 뉴욕 그리고 중국 베이징에 진출한다. 몰입형 미디어아트가 한국이 최초는 아니지만, 아르떼뮤지엄은 기술을 확장해 전 세계적으로 나아가고 있는 긍정적인 사례다. 노형슈퍼마켙 전시장 전경.(사진=노형슈퍼마켙)◇ 스토리가 있는 전시장, 노형슈퍼마켙‘노형수퍼마켙’은 제주시 노형로에 있었던 오래된 서커스장을 리모델링해서 만든 미디어아트 전시장이다. 이곳은 자연을 주제로 한 기존 미디어아트 전시장과는 다르게 스토리가 있는 특색 있는 전시장이다. 면적은 약 4천㎡(1,210평), 최대 높이는 20m(6층 건물 높이)로 2021년 6월 22일 개관했다. 노형수퍼마켙은 사적공간 운영사업자 ㈜제주미르, 프로젝터 시공설계 전문기업 ㈜가이드삼정, 차세대 실감형 콘텐츠 전문기업 ㈜닷밀 등이 손잡아 만든 이머시브마켓이 운영한다.이곳은 ‘1981년 노형수퍼마켙에 열린 문이 제주의 모든 색을 빨아들여, 그 빨아들인 색깔들은 수퍼마켙 중심에 모여 세상에 볼 수 없는 신비로운 광경을 만들어 냈다’라는 설정을 갖추고 있다. 복고 감성을 살리기 위해 과거 동네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수퍼마켙’이란 오자 표기를 그대로 차용했다. 건물 외관을 검은색으로 칠하고 전시장 입구부터 색이 사라진 듯한 흑백으로 디자인해서 전시장에 대한 호기심을 심어준다.‘노형수퍼마켙 프리쇼’, ‘베롱베롱’, ‘뭉테구름’, ‘와랑와랑’, ‘곱을락’ 등 총 5개 전시공간이 있다. 메인 영상 공간인 ‘와랑와랑’은 8가지 영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곳은 기존 서커스장이었던 공간감을 살려 20m 높이에서 주는 영상미가 돋보인다. 흑백의 건물과 대비되는 다채롭고 화려한 색채의 빛으로 관람객들에게 즐거움을 전해준다. 노형수퍼마켙처럼 특색 있는 미디어아트 전시장의 역할은 중요하다. 다양성의 측면에서도 그렇고, 색다른 전시장이 있어야 관람객들 입장에서도 골라 보는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뮤지엄 원 전경.(사진=뮤지엄 원)◇ 8천 만개의 LED 발광 다이오드가 설치된 뮤지엄 원‘뮤지엄 원’(Museum 1)은 2019년 8월 14일 부산 해운대 센텀시티 월석아트홀에 개관한 부산 최초의 미디어아트 전시장이다. ‘뮤지엄 다’로 개관했다가 2022년 3월 뮤지엄 원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재개관했다. 예술 전문 기획사 쿤스트원이 운영한다. 이곳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미디어 작품을 만날 수 있으며, 예술과 4차 산업 시대의 첨단과학이 결합해 창조해낸 새로운 공간이다. 규모는 2300m²(695.75평)로 복층 형태이다. 1층 상설 전시실, 2층 기획전시실을 갖추고 있다. 다른 미디어아트 전시장이 빔프로젝터로 벽면이나 바닥에 영상을 투사하는 것과는 달리, 뮤지엄 원의 826.4m²(250평) 규모의 상설 전시장은 바닥, 천장, 벽면에 약 8천 만개의 LED 발광 다이오드가 설치되어 있다. 그 위로 작품이 구현되는데 그야말로 빛의 향연이라고 할 정도로 눈이 부시다. 그래서 관람객들은 작품 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초현실적인 경험을 겪는다. 뮤지엄 원은 개관전 ‘완전한 세상’을 비롯해 ‘수퍼 네이처’, ‘치유의 기술’ 등의 전시를 열었다. 장승효, 김용민, 강동우, 고지인 등 미술계에서 활동하는 미디어아트 작가들이 전시에 참여한 점도 눈여겨 볼만하다. 앞서 빛의 벙커, 아르떼뮤지엄, 노형슈퍼마켙 등의 전시는 이미 오래전에 세상을 떠난 작가거나 자체 영상팀에 의해 제작된 작품이 상영된다면 뮤지엄 원에서는 미술 작가들이 참여한 작품을 전시한다는 점이 다르다. 빔프로젝터로 단순히 영상을 투사하는 것이 아닌 예술가들이 만든 진짜 미디어아트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외에도 국내 미디어아트 전시장으로는 그라운드시소 명동, 홍대입구 띠아트, 뚝섬미술관 등이 있다. 제주도에 또 다른 미디어아트 전시장으로 제주한라대학교가 운영하는 ‘한라 컨템포러리’(Halla Contemporary)가 2023년 개관할 예정이다. 한라 컨템포러리는 미디어아트의 현재와 미래를 아우르는 전시 공간으로 운영된다니 기대가 크다. 독자들에게 국내의 사립 미디어아트 전시장을 통해 현재 미디어아트의 인기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길 바란다. 미디어아트에 대한 이해도가 한층 더 높아진 시간이었다면 더할 나위 없은 기쁨이겠다.△ 글=이상미 프랑스 파리 고등미술연구원 예술경영학과에서 수학했고, 파리 고등실천연구원에서 서양예술사학과 고고학으로 석사 학위, 파리 고등사회과학연구원에서 미학으로 박사과정을 밟았다. 이상아트(주) 대표이사이자 유럽문화예술콘텐츠연구소장으로도 활동 중이다. 미술계 현장에서 활발한 활동과 함께 이론과 실무를 겸비한 전문성을 갖고 있다.
- [이상미의 미디어아트] 국내 국공립 미디어아트 전시장 살펴보기
- ‘백남준이 오래 사는 집’이라는 별칭이 있는 백남준아트센터 전경.(사진=백남준아트센터)[이데일리 고규대 기자] 최근 몇 년간 미디어아트 시장은 급성장했다. 캔버스를 벗어난 벽이나 바닥 등 다양한 공간을 도화지로 사용하는 미디어아트가 관심을 끌고 있다. 미디어아트는 메타버스와 NFT의 기술적 성장과 더불어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다. 이번 연재로 미디어아트를 가까이 접할 수 있는 전시 공간과 그 공간 속 작가들의 이야기를 다뤄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미디어아트가 우리의 일상으로 찾아왔다. 미술관·박물관·갤러리뿐만 아니라 지하철·터널·공원 등의 다양한 실내외 공간에서 미디어아트를 만날 수 있다. 미디어아트가 허물고 낡은 공간에 생기를 더하면서 도시 재생 효과까지 만들고 있다. 2002년 사업자의 폐업 신고 이후 19년 넘게 방치된 충주 수안보 와이키키호텔이 미디어아트 전시장을 갖춘 감성 호텔로 재탄생한다는 소식이 2022년 5월에 들려왔다. 2024년 상반기에 개장할 예정이란다. 미디어아트의 전성기가 도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국내에서 미디어아트 전시는 언제 시작됐을까? 지자체의 노력으로는 서울시가 1999년 기획한 ‘미디어아트 페스티벌’이 있다. 이듬해인 2000년 ‘도시: 0과 1사이’를 주제로 제1회 ‘미디어시티 서울’이 열렸다. 서울과 미디어 환경의 변화 속에서 미술의 동시대성과 실험성을 주목하며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이 행사는 올해 12회를 맞았다. 정식 명칭은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이다. 서울시립미술관이 주최하는 대표 국제전으로 광주비엔날레, 부산비엔날레와 함께 한국의 3대 비엔날레로 꼽힌다.우리나라에 미디어아트가 정착하는 과정을 살펴보기 위해 주요 미디어아트 전시장에 대해 다루고자 한다. 먼저 백남준아트센터, 울산시립미술관, 광주미디어아트플랫폼 등 지자체가 운영하는 미디어아트 전시장의 현주소를 알아보자.◇백남준이 오래 사는 집, 백남준아트센터백남준이 ‘백남준이 오래 사는 집’이라고 명명한 백남준아트센터는 국내 최초의 미디어아트 전문 공공미술관이다. 경기문화재단 소속의 경기도 도립미술관이다. 백남준이 살아생전인 2001년 작가와 경기도는 미술관 건립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백남준아트센터는 백남준이 직접 지은 이름이다. 이곳은 2006년 백남준 별세 2년을 맞이해 2008년 4월 30일 준공식을 하고 그해 10월 9일 공식 개관했다. 지하 2층, 지상 3층으로 전체면적 5,605㎡(1,695평) 규모다. 백남준아트센터는 ‘단순히 백남준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작가에 대한 이해와 공감의 증진이라는 과업’을 목표로 한다. 최신의 미디어아트, 차세대 미디어 아티스트까지 포괄하면서 실험적 예술 활동, 창의적 학술 활동을 배양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백남준과 동시대 미디어 작가들이 함께하는 전시도 기획하고 있다.백남준의 ‘TV 물고기’(사진=백남준아트센터).백남준과 동료 작가들의 작품, 백남준의 실험적인 예술정신을 공유하는 동시대 미디어 아티스트의 작품을 240점 넘게 소장하고 있다. 백남준의 주요 소장품으로는 기술을 대변하는 텔레비전이 하나의 유기체적 공간을 이루는 ‘TV 정원’(1972(2002), 한 줄로 늘어선 24개의 컬러 모니터 앞에 같은 크기의 어항 24개를 설치한 ‘TV 물고기(비디오 물고기)’(1975(1997), CCTV를 통해 부처의 영상을 실시간으로 녹화해 텔레비전으로 보내 부처가 텔레비전에 비치는 영상을 바라보도록 하는 ‘TV 부처’(1974(2002) 등이 있다. 백남준과 관련한 서신, 사진 등의 1차 자료로 구성된 아카이브 컬렉션들과 백남준의 스튜디오를 재현한 스튜디오 컬렉션, 그리고 2,285점의 아날로그 비디오 테이프로 구성된 비디오 아카이브 컬렉션 등이 있는 아카이브도 운영한다. 백남준아트센터는 실험적이고 창의적인 백남준의 예술정신을 계승한 작가에게 ‘백남준아트센터 국제예술상’을 수여한다. 2009년 제정한 이 상은 작가의 예술정신에 대한 지금의 의미를 사유하고, 실험적이고 창조적인 예술가를 발굴, 소개한다. 역대 수상자로는 2009년 안은미, 이승택, 씨엘 플로이에, 로버트 앤드리안 엑스, 2010년 브뤼노 라루르, 2012년 더그 에이트킨, 2014년 하룬 미르자, 2016년 블라스트 씨어리, 2018년 트레버 페글렌, 2020년 캠프 등이 있다.미디어아트가 미술계에서 새롭게 인식되면서 백남준의 위상도 함께 올라갔다. 이와 함께 백남준아트센터의 중요성도 더욱 커진 모양새다. 백남준과 관련한 다양한 전시와 프로그램들이 매년 줄지어 열린다. 백남준의 혼과 정신이 깃들어 여전히 백남준을 살아 숨 쉬게 해주는 백남준아트센터가 미디어아트 미술관으로서의 위상을 계속 이어나가길 바란다. 울산시립미술관 전경.◇ 미디어아트의 성지, 울산시립미술관울산시립미술관은 울산시가 광역시 승격 25년 만에 처음 생긴 공공미술관이다. 2022년 1월 6일 개관, 1년도 안 된 신생 미술관이다. 5대 광역시를 비롯해 주요 지자체 가운데서도 가장 늦게 문을 열었다. 오히려 늦게 문을 연 것이 다른 지자체 미술관과는 달리 특화되는 점이 있다. 가장 최신 시설을 갖춘 것은 물론이요, 미디어아트 전용 전시관도 갖췄다. 울산시립미술관은 ‘실험적이고 창의적인 예술을 모두가 공유하는 참여와 체험의 공간’을 목표로 한다. 특히 2000년대 이후 미술계에서 급부상한 미디어아트를 미술관의 품으로 진지하게 품었다. 이곳은 부지 6,182㎡(1,870평)에 건물 연면적 12,770㎡(3,862)로 지하 3층, 지상 2층의 규모다. 이 가운데 눈에 띄는 전시실이 하나 있다. 국내 공공미술관 최초로 실감 미디어아트 전용관인 XR랩(Extended Reality Lab)을 갖췄다. 이곳은 307㎡(92.8평) 규모로 가상현실(VR), 증강현실(AR), 혼합현실(MR) 등 최신 디지털 기술의 미디어아트를 체험할 수 있다. 울산시립미술관의 소장품 1~3호는 모두 비디오아트의 창시자 백남준의 작품이다. 1호 소장품은 ‘거북’(1993), 2호 소장품은 ‘시스틴 채플’(1993), 3호 소장품은 ‘케이지의 숲, 숲의 계시’(1992∼1994)이다. ‘거북’(1993)은 백남준이 텔레비전 166대를 거북 형상으로 만든 대형 비디오 조각 작품이다. 크기는 10m×6m×1.5m에 달한다. 이 작품은 울산의 대표 문화재인 반구(盤龜)대 암각화(국보 제285호)와 연결되어 울산의 문화 정체성을 잘 표현한 작품이다. 울산시립미술관은 개관 특별전으로 17명의 국내외 미디어아트 작가들이 참여하는 ‘포스트 네이처: 친애하는 자연에게’를 열었다. XR랩에서는 백남준과 더불어 비디오와 텔레비전을 예술매체로 사용한 미국의 실험미술가 알도 탐벨리니의 ‘블랙 앤드 라이트: 알도 탐벨리니’를 개최했다. 울산시립미술관은 ‘백남준 탄생 90주년 특별기획전’을 비롯해 다양한 미디어아트 전시를 선보이며, ’실험성과 창의성으로 과거를 읽고 현재를 보며 미래를 담아내는 미술관이 되겠다‘라는 목표에 계속 향해가고 있다. 개관 1년도 안 된 울산시립미술관은 벌써 미디어아트의 성지로 자리 잡았다.광주미디어아트플랫폼의 개관전 ‘디지털 공명’ 전시 전경(사진=광주미디어아트플랫폼).◇ 미디어아트 창의 도시를 이끌 광주미디어아트플랫폼광주는 유네스코가 선정한 미디어아트 창의 도시다. 유네스코는 2004년부터 음악, 민속공예, 디자인, 영화, 음식, 문학, 미디어 등 7개 분야에 걸쳐 탁월한 창의성을 발휘해 세계 인류문화 발전에 기여한 도시를 선정, 창의 도시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광주는 2014년 12월 1일 세계에서 4번째로 유네스코 미디어아트 창의 도시로 지정되었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미디어아트 창의 도시는 광주를 포함해 프랑스 리옹·엥겔레뱅, 일본 삿포로, 영국 요크, 미국 오스틴, 오스트리아 린츠, 세네갈 다카르 등 16개국 17개 도시이다. 광주는 유네스코 미디어아트 창의 도시로 선정됨에 따라 2015년 ‘광주 미디어아트 창의도시 마스터 플랜’을 수립했다. 이어 2017년 시민과 예술가의 창의 역량을 축적하고 창의적인 도시환경 개선을 통해 광주만의 미디어아트를 체계적으로 육성할 수 있는 인프라 구축을 위해 유네스코미디어아트창의도시 플랫폼(AMT센터) 조성 기본계획을 수립했다. 이를 통해 2022년 3월 30일 개관한 곳이 바로 광주미디어아트플랫폼(Gwangju Media Art Platform, 이하 GMAP)이다. 광주시립미술관 소속의 미술관이다.국내 최고 수준의 미디어파사드와 전시·교육·체험 복합공간을 갖춘 G MAP은 지하 2층, 지상 3층 등으로 총 5층 규모다. 대지면적은 5,547㎡(1,677.9평), 총넓이는 9,747㎡(2,948평)이다. 이곳은 아카이브, 전시, 연구 및 생산을 결합함으로써 미디어아트 관련해 ‘기획-창작-교육-연구-산업’ 등으로 이어지는 선순환 체계를 구축을 목표로 한다. 또한, 광주를 대표하는 랜드마크로 조성하며 유네스코 미디어아트 창의도시의 정체성을 확립해 세계를 향한 광주 미디어아트의 허브가 될 수 있도록 나갈 예정이다. G MAP은 개관전으로 국내외 미디어 작가들이 참여 과거와 현재, 미래가 마주하고 상호작용하는 현상을 고찰하면서 정보 데이터에 기반한 디지털 예술의 실험과 방향을 보여주는 <디지털 공명> 전을 열었다. 또한, 미디어아트 아카데미 강좌로 국내 전문가들이 나서 강연하는 총 9회차의 ‘뉴미디어아트에서 NFT까지’를 여는 등 G MAP은 활발한 행보를 펼치고 있다. 필자도 이 강연에 강연자로 나서 나날이 발전해가는 G MAP을 지켜보았다. 다음 편에서는 민간에서 운영하는 주요 미디어아트 전시장을 알아보자.△ 글=이상미 프랑스 파리 고등미술연구원 예술경영학과에서 수학했고, 파리 고등실천연구원에서 서양예술사학과 고고학으로 석사 학위, 파리 고등사회과학연구원에서 미학으로 박사과정을 밟았다. 이상아트(주) 대표이사이자 유럽문화예술콘텐츠연구소장으로도 활동 중이다. 미술계 현장에서 활발한 활동과 함께 이론과 실무를 겸비한 전문성을 갖고 있다.
- [이상미의 미디어아트] 미디어아트의 확장
- [이데일리 고규대 기자] 최근 몇 년간 미디어아트 시장은 급성장했다. 캔버스를 벗어난 벽이나 바닥 등 다양한 공간을 도화지로 사용하는 미디어아트가 관심을 끌고 있다. 미디어아트는 메타버스와 NFT의 기술적 성장과 더불어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다. 이번 연재로 미디어아트를 가까이 접할 수 있는 전시 공간과 그 공간 속 작가들의 이야기를 다뤄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예술은 고정관념의 진리처럼 불변하지 않는다. 예술은 변한다. 새로워지고 낯설어진다. 인류 최초의 예술로 꼽히는 스페인의 알타미라 동굴 벽화는 1만 8천5백 년 전에서 1만 4천 년으로 추정된다. 지구의 마지막 빙하기가 약 1만 8천 년 전에 끝났다고 한다. 인간이 무언가를 남기고자 한 열망이 예술이 되었다는 말도 일리가 있다. 최근 기술과의 만남으로 예술은 대변혁을 이루었다. 매체를 기반으로 한 미디어아트 역시 마찬가지다. 매체예술이라고도 불리는 미디어아트는 1839년 사진의 발명 이후 이미지의 기계적인 재현과 복사가 가능해지면서 도래하게 된 TV, 비디오 같은 매체들을 바탕으로 점차 확정되어왔다. 미디어아트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그 종류도 변모해왔다. 백남준이 활동했던 시대에는 TV와 비디오였다. 오늘날에는 인터넷과 컴퓨터를 기반으로 한 이미지와 영상이 그 자리를 대체했다. 예술가들은 미학적으로 기존 매체들과 구분되는 독창성을 찾고자 노력했다. 그 결과, 여러 유형의 이미지 변형과 왜곡 기술이 유행하게 되면서 미디어아트는 현재 여러 장르와 결합하며 그 영역을 꾸준히 확장하고 있다. 인터랙티브 아트, 컴퓨터 아트, 넷 아트 등으로 미디어아트의 분류와 확정되는 분야를 살펴보자.스페인의 알타미라 동굴벽화 본제본◇ 인터랙티브 아트미디어아트가 회화나 조각 같은 예술과 다른 점은 무엇일까? 바로 작가와 관객의 상호작용에 있다. 미디어아트의 특징은 인터랙션(Interaction)이다. 인터랙티브 아트의 특징은 말 그대로 관람객과 상호작용하는 예술이다. 인터랙티브(Interactive)는 ‘상호 간’이라는 뜻을 지닌 인터(Inter)와 ‘활동적’이라는 뜻을 지닌 액티브(Active)의 합성어다. 예술가가 일방적으로 작품의 의미나 의도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 관람자와 상호 소통을 할 수 있다. 작가와 작품 사이의 인터랙션도 가능하다. 그저 관람객이 수동적으로 작품을 보는 데 그쳤던 전통 예술과는 달리 인터랙티브 아트는 관람객들에게 능동적으로 작품에 대한 다양한 행동을 끌어낸다. 이를 위해 인터랙티브 아트는 시각, 청각, 촉각과 같은 관람객의 감각 행위에 해당 작품이 반응하도록 설계된다.그렇다면 인터랙티브 아트의 대표 작품은 무엇인가? 1999년 미국의 미디어 아티스트 카밀 우터백(Camille Utterback)과 이스라엘 출신의 컴퓨터 공학자 로미 아키튜브(Romy Achituv)가 공동 작업한 ‘텍스트 레인’(1999)이다. 대형 프로젝션 스크린에 투사된 관람객의 움직임에 맞춰 알파벳 문자가 흘러내린다. 관람객들에게 떨어지는 작은 영문 알파벳들이 마치 눈송이 같기도 하다. ‘텍스트 레인’에서 관람객이 체험하는 텍스트 애니메이션은 가변적 조합으로 재구성된 에반 짐로드(Evan Zimroth)의 언어와 신체에 대한 시인 ‘Talk, You’의 알파벳 문자들이다. 이 시는 1993년 출간된 시집 ‘Dead, Dinner, or Naked’에 수록되어 있다. ‘텍스트 레인’에는 모션 캡처 기술이 사용되었다. 모션 캡처는 전시장의 교육이나 놀이 프로그램으로 활용된다.미국의 미디어 아티스트 카밀 우터백과 이스라엘 출신의 컴퓨터 공학자 로미 아키튜브가 공동 작업한 ‘텍스트 레인’(1999)은 인터렉티브 아트의 대표로 손꼽힌다.◇ 컴퓨터 아트컴퓨터 아트는 컴퓨터그래픽을 활용한 예술을 말한다. 컴퓨터 아트는 1960년대 초에 등장했다. 당시 컴퓨터는 매우 거대하고 가격도 어마어마했기 때문에 대기업 부설 연구소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기계였다. 다룰 수 있는 사람도 공학자나 수학자 정도였다. 컴퓨터 아트의 출발점도 미국의 대형 통신회사 AT&T에서 지원을 받은 벨연구소의 마이클 놀이라는 공학자이다. 그는 벨연구소에서 컴퓨터를 통해 이뤄진 작업을 출력하는 과정에서 프로그래밍 오류 발생했는데, 특정한 패턴이 없는 무작위적 그래픽이 출력된 것이다. 놀은 ‘컴퓨터 아트’라고 불렀다. 그는 우연히 만들어진 출력물에서 예술적 영감을 얻어 디지털 아트를 창작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1960년대 독일에서도 컴퓨터 아트가 시도되었다. 독일 예술가 프리더 나케와 게오르크 네스는 각각 수학과 철학을 전공한 이들로서 통계적 무작위성과 미학에 대한 고찰을 바탕으로 컴퓨터를 활용한 작품을 만들어내려고 했다. 이들은 자기 작품을 1965년 슈투르가르트에 있는 벤델린 니들리히 갤러리에 전시했다. 이는 컴퓨터 아트를 하는 예술가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 중 하나였다. 컴퓨터라는 새로운 매체로 창작자의 표현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준 것이다.1980년대에 들어서 컴퓨터의 가격이 더 낮아지고 이용법 또한 쉬워지자, 예술가들이 컴퓨터를 예술에 접목하기 시작했다. 그 후 더 저렴하고 성능이 향상된 개인용 컴퓨터가 대중화되면서 그래픽, 애니메이션, 디지털 이미지 등 컴퓨터 기술을 바탕으로 하는 예술은 발전되었다. 컴퓨터를 통한 예술은 실물 없이 가상의 세계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이것은 단지 현실 세계의 재현이나 표현에서 벗어나 예술가가 생각하는 상상과 환상의 세계를 만들어내고 변형을 가할 수도 있다.컴퓨터 아트의 특징으로는 상호작용적이며, 네트워크를 통해 창작자와 관람자 간의 소통이 가능하다. 컴퓨터 아트는 모든 정보가 디지털화되어 있어 아날로그 방식의 매체와 다르게 완전 복제가 가능하다. 이는 예술의 ‘비 물질화’를 가능하게 함으로써 실물이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는 오리지널 개념의 폐기를 가져왔다고 할 수 있다.헝가리 예술가인 베라 몰나르(Vera Molnar)는 컴퓨터 아트의 초기 개척자 중 한 명이다. 그녀의 철저한 컴퓨터 시스템 기반의 접근 방식은 예술과 기술 간의 현대적 교차점에 대한 매개변수를 정립하는 데 기여했다. 베라 몰나르는 컴퓨터 드로잉을 통해 복잡하고, 급하게 그린 듯한 일련의 선이 있는 작품을 선보였다. 그녀는 컴퓨터를 사용해 자신이 표현한 것을 혁신적이고 급진적인 작업으로 확장해 나갔다. 이를 통해 미학적인 충격을 만들어냈다. 체계적이고 대칭적인 단순하고 평범한 요소들을 배제 시키기 위해 작가가 우연적이거나 임의로 바꾸어 만들어 낸 것이었다.베라 몰나르가 컴퓨터 드로잉으로 작업한 ‘Molndrian 74,066/11.23.00’(1974) 작품◇ 넷 아트 오늘날의 예술에 있어서 인터넷은 상당히 큰 역할을 한다. 인터넷을 활용하는 넷 아트(Net Art 또는 웹 아트)는 예술에 인터넷을 비롯한 디지털 기술을 접목한다. 실물 작품에서는 불가능한 경험이나 감상이 넷 아트에서는 가능하다. 마우스나 키보드로 누르면 화면에서 보이지 않던 것들이 다양하게 확장되는 걸 보거나 들을 수 있다. 월드와이드웹(www)은 1991년에 배포된 이름이다. 1989년부터 스위스 제네바에 위치한 유럽소립자물리학연구소에서 영국의 컴퓨터 과학자 팀 버너스-리에 의해 개발되었다. 월드와이드웹의 의도는 물리학자들 간의 국제적 커뮤니케이션을 돕는 데 있었다. 그 후 군사나 대학의 연구 목적에 활용되다가 일반에 개방되었다. 넷 아트는 기술이 예술의 발전을 이끈 대표적인 사례다. 넷 아트는 1997년 독일의 카셀 도큐멘타 X에서 선보였다. 이듬해인 1998년 여름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은 웹을 위한 첫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작품이 대만계 미국 예술가인 슈 리아 창(Shu Lea Cheang)의 ‘브랜든’(1998)이다. 티나 브랜든이라는 실존했던 여성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트랜스젠더인 티나 브랜든은 안타깝게도 1993년 강간 후 살해되는 끔찍한 범죄를 입었다. 이 작품은 구겐하임 미술관이 제작한 ‘브랜든’ 웹사이트에서 볼 수 있다. 웹사이트에 접속해 마우스로 화면 중앙을 클릭하면 여러 이미지가 바둑판 모양으로 나열된다. 브랜든의 삶과 죽음에 대한 광범위한 영향을 조명하기 위해 육체가 없는 인간 형태의 이미지, 범죄와 형벌을 주제로 한 문장이나 그림들이 나온다. 마우스로 클릭할 때마다 다른 이미지로 변형된다. 이를 통해 슈 리아 창은 브랜든의 죽음에 대해 되묻고 있다. 대만계 미국 예술가인 슈 리아 창(Shu Lea Cheang)이 티나 브랜든이라는 실존했던 여성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다룬 작품인 ‘브랜든’(1998)이다. 트랜스젠더인 티나 브랜든은 안타깝게도 1993년 강간 후 살해되는 끔찍한 범죄를 입었다.◇ 나날이 확장하는 미디어아트그 외에도 파일 전송법과 복사 미술에서 비롯되어 정보통신과 상호작용적인 네트워크, 위성 예술인 커뮤니케이션 아트, 위치 파악 미디어 프로젝트, 예술가가 제작한 비디오 게임, 멀티미디어를 이용한 설치작업과 퍼포먼스, 생명과학 기술을 활용한 바이오 아트, 인공지능이 만들어내는 아트 등이 있다. 미디어아트는 기술 발전에 따라 계속 변화하고 있기에 현재진행형이라고 볼 수 있다. 기존 미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새로운 예술이기에 미디어아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미학의 정립 또한 필요하다. 20세기 미술사조는 새로운 양식이 미술사조가 등장할 때마다 어떤 이즘(-ism)으로 묶으려 했다. 오늘날의 미디어아트는 디지털을 활용해 무궁무진한 잠재력과 발전을 거듭하면서 이즘에 국한되지 않으려 한다. 디지털 기술이 여러 장르에 영향을 끼치는 현재 회화, 조각, 사진, 퍼포먼스 등 장르 간의 경계도 점차 허물어지고 있다. 여기에 미디어아트는 여러 매체를 혼합하며 현대미술의 대표로 거듭나고 있다. 미디어아트는 과연 어디까지 확장하게 될까?△ 글=이상미 프랑스 파리 고등미술연구원 예술경영학과에서 수학했고, 파리 고등실천연구원에서 서양예술사학과 고고학으로 석사 학위, 파리 고등사회과학연구원에서 미학으로 박사과정을 밟았다. 이상아트(주) 대표이사이자 유럽문화예술콘텐츠연구소장으로도 활동 중이다. 미술계 현장에서 활발한 활동과 함께 이론과 실무를 겸비한 전문성을 갖고 있다.
- [이상미의 미디어아트] 살아있는 비디오아트의 거장, 빌 비올라
- [이데일리 고규대 기자] 최근 몇 년간 미디어아트 시장은 급성장했다. 캔버스를 벗어난 벽이나 바닥 등 다양한 공간을 도화지로 사용하는 미디어아트가 관심을 끌고 있다. 미디어아트는 메타버스와 NFT의 기술적 성장과 더불어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다. 이번 연재로 미디어아트를 가까이 접할 수 있는 전시 공간과 그 공간 속 작가들의 이야기를 다뤄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살아있는 비디오아트의 거장이라 불리는 빌 비올라.빌 비올라(Bill Viola)는 살아있는 비디오아트의 거장이다. 국제갤러리에서 2003년·2008년·2015년 등 3회에 걸친 개인전 그리고 국립현대미술관·부산시립미술관 이우환 공간에서의 전시로 우리에게는 친숙하다. 작가는 백남준의 조수로도 일한 경험이 있다. 백남준이 비디오아트의 창시자라면, 비올라는 비디오아트를 대중에 널리 알리고, 예술의 반열에 오르게 한 인물이다.그는 40년 넘게 삶과 죽음에 대한 원초적 질문과 감정·의식 등을 주제로 한 200점의 작품으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아 왔다. 1983년 뉴욕현대미술관, 1997년 휘트니 미술관, 2003년 폴 게티 미술관, 2004년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 2006년 일본 모리 미술관 등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1995년과 2007년 두 차례의 베니스 비엔날레에 미국 대표로 참여하기도 했다. 70살이 넘은 빌 비올라는 미국 캘리포니아에 거주하며 왕성하게 활동 중이다. 비디오아트를 현대미술의 한 분야로 확고하게 자리 잡게 한 선구자인 빌 비올라의 삶과 작품 세계를 만나보자.빌 비올라의 초기작 중 하나인 ‘투영하는 연못’(1977~1979).◇ 물에 빠져 생사를 오갔던 유년 시절의 기억비올라는 1951년 미국 뉴욕 퀸즈에서 태어나 웨스트베리에서 자랐다. 그의 유년기에서 잊지 못할 기억이 있다. 6세 때 익사할 뻔한 순간이다. 다행히 삼촌이 건져 올렸다. 30대가 된 빌 비올라는 푸르고 녹색 빛의 물속이 아름다웠다고 이야기한다. 그의 작품에 물이 자주 등장하는 건 이 유년의 기억과도 맞닿아 있다. 그는 뉴욕에 있는 시라큐스 대학교에서 실험영상학을 전공하며 회화·뉴미디어·인지심리학·전자 음악 등을 배웠다. 비올라는 전자 미디어아트 역사의 거장인 피터 캠퍼스의 영향을 받아 1970년대 초 비디오 작업을 시작했다. 1973년 대학 졸업 후 시라큐스에 있는 에버슨 미술관에서 비디오 기술자로 일했다. 당시 에버슨 미술관은 비디오아트와 뉴미디어 전시를 주로 개최했다. 비올라는 백남준과 같은 당시 유명 작가들의 전시 설치를 도왔다. 1974년 시작된 백남준과의 인연은 1979년까지 이어졌다. 비올라는 백남준이 ‘과달카날 레퀴엠’(1977)을 제작할 때 촬영을 담당하기도 했다. 비올라는 2015년 국제갤러리와 한 인터뷰에서 백남준에 대해 “내 평생 그런 분은 처음 만나봤다. 너무 에너지 넘치고 정말 재미도 있고 지극히 아름다운 분이었다. 나이 든 분이나 젊은이든 그 누구에게도 마음이 열린 분이고 내가 만난 사람 중에 최고의 분이었다”라고 말했다.비올라는 작곡가인 데이비드 투도어와 1973년부터 1980년까지 함께 일하며 음악과 음향에 대한 자신의 관심과 이해를 발전시켜 나갔다. 1974년부터 1976년까지 이탈리아 피렌체에 있는 마리아 글로리아 콘티 비코치가 이끄는 선구적인 비디오 스튜디오인 Art/tapes/22에서 테크니컬 디렉터로 일했다. 1976년과 1977년에 그는 전통 공연예술을 녹음하기 위해 솔로몬 제도, 자바, 인도네시아를 여행했다. 이때의 경험은 훗날 그의 작품에 녹아든다.1977년 빌 비올라는 오스트레일리아 멜버른에 있는 라트로브 대학교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이때 교양 미술 담당자였던 키라 페로프를 만났는데, 둘은 서로에게 평생의 반려자가 된다. 비올라와 페로프는 작업에 있어서 협력 관계를 형성했다. 페로프는 1978년부터 비올라의 비디오테이프와 설치물을 관리하고 행정 일을 하고 있다.비올라는 1970년대에 슈퍼8 필름과 흑백 비디오로 작품을 시작했다. 슈퍼8 필름은 1965년 이스트먼 코닥사가 출시한 8mm 필름이다. 기존 필름보다 큰 면적에 이미지를 담아 농도나 선명도가 뛰어났다. 이 당시 비올라의 초기 작업은 비디오라는 매체가 가진 예술적 가능성을 꾸준히 실험하며, 예술 장르로 개척함과 동시에 ‘인간과 세계와의 관계와 본질적인 존재 구조’를 탐구했다. 초기작 중 하나는 ‘투영하는 연못’(1977~1979)이다. 숲에서 걸어 나와 물웅덩이 앞에 선 남자가 물을 향해 뛰어들려고 힘차게 도약하는 일순간에 화면이 멈춘다. 자세히 보면 남자를 제외한 주변 풍경은 아주 느리게 움직인다. 시간을 물질로 파악하고, 이를 시각화하기 위해 고민한 흔적이 담긴 작품이다.◇ 어머니의 죽음과 아이의 탄생1980년에는 일·미 문화교류 펠로우십을 통해 다나카 다이엔 선사와 함께 불교를 공부했다. 이 기간에 비올라는 소니 아츠기 연구소의 상주 예술가이기도 했다. 일본에서 선(禪) 수행은 비올라의 작품세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비올라는 이때 일본에서의 경험을 통해 인생이 바뀌었다고 술회했다. 비올라는 1983년 미국 캘리포니아에 있는 캘리포니아 예술학교(California Institute of the Arts, 칼아츠로 부르기도 함)의 비디오 교과목의 강사가 되었다. 칼아츠는 오늘날 미국 최고의 예술대학으로 손꼽힌다. 그해 뉴욕현대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 정도이니 비올라가 비디오아트로 예술계에서 인정받았다는 걸 알 수 있다. 1980년대에 비올라는 ‘나는 내가 무엇 같은지 모른다’(1986)를 통해 죽은 들소나 생선이 썩어가고 이를 다른 생물이 뜯어먹는 과정을 통해 죽음과 생명의 순환을 다룬다. 이미 생과 사를 인지하던 그였지만, 더 큰 변화의 계기가 찾아온다. 바로 1990년 겪게 되는 어머니의 죽음과 아이의 탄생이다. 비올라는 어머니의 임종과 아이의 탄생을 비디오에 담아 ‘통과하다’(1991)라는 작품으로 발표한다. 그는 죽음과 삶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으며, 이는 곧 작품 세계에도 반영된다. 바로 ‘느림의 미학’이다.비올라가 1995년 베니스비엔날레 미국관 대표로 참여해 발표한 작품인 ‘인사’(1995).◇ 빌 비올라를 대표하는 ‘느림의 미학’비올라는 어머니의 죽음을 겪게 된 1990년대 이후부터 초고속 카메라로 촬영한 영상에 슬로 모션을 사용하거나 되감기 기법을 적용해 시간을 확장하는 작업을 선보인다. 짧은 기록은 보통 10분 내외의 길이로 늘어난다. ‘인사’(1995)는 비올라가 1995년 베니스 비엔날레 미국관 대표로 참여해 발표한 작품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화가 폰토르모의 ‘방문’(1528~1529)이라는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했다. 두 명의 여자가 서로 대화하는 중에 갑자기 한 명의 여자가 더 끼어든다. 이 작품은 고정된 카메라로 45초간 촬영된 영상을 10분 22초 길이로 매우 느리게 재생해 보여준다. 느린 속도로 보면 가운데 있는 여성이 다른 여성의 등장으로 극도의 소외를 겪는 게 확연히 드러난다. 비올라는 시간의 구조를 일부러 변형시킨 느림을 통해 우리가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인간 존재를 바라보게 한다. 부산시립미술관 이우환 공간에서 열린 ‘이우환과 그 친구들Ⅱ-빌 비올라, 조우’ 전시는 비올라의 영상과 영상설치 작품 총 16점을 공개했다. 작품 전체 상영시간이 약 6시간 30분에 달할 정도이니, 비올라가 추구하는 느림의 미학이 어느 정도인지 예측해볼 수 있다.화면을 거꾸로 재생하는 되감기 기법은 시간을 뒤로 돌리는 것과 같은 효과를 준다. 떨어지던 물이 다시 하늘로 올라가는 식으로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시간을 작품 속에서는 마치 신처럼 주무른다. 비디오아트를 하는 많은 예술가가 새로운 기술을 빠르게 채택하고 있지만, 비올라는 디지털 편집에 거의 의존하지 않는다. 그런데 세련되고 능숙하게 뉴미디어와 기술을 다루고 있다. 기술은 그저 작가의 작품 세계를 구축하는 도구일 따름이다.비올라는 관람객로 하여금 자신의 작품에 빠져들게 하며, 그동안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섬세하고도 미묘한 감정 변화 그리고 생각을 하게 한다. 긴 세월 동안 비올라의 작품 세계를 연구한 세계적인 큐레이터 제롬 뇌트르는 “빌 비올라는 지난 40여 년간 3가지 형이상학적 질문과 싸워왔다. 첫째 나는 누구인가, 둘째 나는 어디에 존재하는가, 셋째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고 말했다. 비올라는 종이 대신 영상으로 시를 쓰는 시인처럼 우리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근원적인 물음을 던진다. 어떻게 답할지는 관람객들의 몫이다. 2014년 5월 영국 런던의 세인트폴 성당에 영구 설치된 빌 비올라의 ‘순교자(흙, 공기, 불, 물)’ 시리즈 4점.◇ 살아 있는 거장의 길1997년 미국의 휘트니 미술관은 비올라의 25년 회고전을 기획하고 국제 투어를 통해 비올라의 작품이 세계적인 미술관에 순회하도록 했다. 가히 살아있는 거장의 행보다. 비올라는 2007년 열린 제52회 베니스 비엔날레에 초청되어 ‘해변 없는 바다’라는 작품을 선보였다. 이 작품은 이듬해 국립현대미술관에 전시되기도 했다. 영국 런던의 세인트폴 성당의 의뢰로 비올라는 200만 달러(약 22억 원)를 들여 제작한 ‘순교자(흙, 공기, 불, 물)’ 시리즈 4점을 2014년 5월 영구 설치했다. 유럽의 교회에서 다빈치·렘브란트·카라바조 등 뛰어난 예술가에게 성화 제작을 주문했던 오랜 역사를 잇는 방식이다. 세인트폴 성당은 최소 10년 이상의 회의를 거쳐 비올라의 작품 설치를 결정했다고 한다. 전통 회화가 아닌 비디오아트, 그것도 비올라를 선택했다는 점은 비올라가 살아있는 거장이라는 방증이기도 하다.비올라는 국제갤러리에서의 전시로 내한했을 때 가진 언론사 기자들과의 간담회에서 “미디어아트의 미래를 어떻게 전망하는가?”라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중요한 것은 미래보다 우리가 현재 사는 이 세상을 ‘어떻게 잘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다.” 가히 우문현답이 아닐 수 없다. 현존하는 비디오아트의 거장, 빌 비올라가 어떤 새로운 작품으로 우리에게 찾아올지 기대가 된다. △ 글=이상미 프랑스 파리 고등미술연구원 예술경영학과에서 수학했고, 파리 고등실천연구원에서 서양예술사학과 고고학으로 석사 학위, 파리 고등사회과학연구원에서 미학으로 박사과정을 밟았다. 이상아트(주) 대표이사이자 유럽문화예술콘텐츠연구소장으로도 활동 중이다. 미술계 현장에서 활발한 활동과 함께 이론과 실무를 겸비한 전문성을 갖고 있다.
- [이상미의 미디어아트] 비디오아트의 창시자 백남준을 말하다
- 1982년 시카고 현대 미술관에서 CBS 선데이 모닝 방송을 위해 ‘자석 TV’를 설명하는 백남준.(사진=백남준아트센터)[이데일리 고규대 기자] 최근 몇 년간 미디어아트 시장은 급성장했다. 캔버스를 벗어난 벽이나 바닥 등 다양한 공간을 도화지로 사용하는 미디어아트가 관심을 끌고 있다. 미디어아트는 메타버스와 NFT의 기술적 성장과 더불어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다. 이번 연재로 미디어아트를 가까이 접할 수 있는 전시 공간과 그 공간 속 작가들의 이야기를 다뤄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7월 20일은 한국이 낳은 전 세계적인 예술가 백남준(1932~2006)이 탄생한 지 9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백남준은 한국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공부하고 이후 독일로 건너가 유학 생활을 했다. 1964년 미국으로 건너가 예술가로 활동했다. 2006년 백남준은 한국에서 저 멀리 떨어진 미국 마이애미에서 뇌졸중 투병생활 중에 끝내 생을 마감했다. 올해는 백남준이 우리 곁을 떠난 지 16주기가 되는 해이기도 하다. 오늘날 우리에게 친숙한 미디어아트의 첫 출발지로 비디오아트를 보고 있다. 그중 백남준은 비디오아트의 창시자라고 불린다. 비디오아트의 사전적 의미는 텔레비전 화면, 비디오 영상을 이용하는 예술이다. 백남준은 1960년대부터 비디오아트를 시작했다. 그렇기에 미디어아트를 말하려면 백남준이라는 인물을 탐구해 봐야 한다. 백남준의 삶과 예술세계를 통해 미디어아트에 대해 조금 더 깊이 있게 들어보자.◇ 한국을 떠나 일본으로, 일본을 떠나 독일로백남준은 1932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청소년기의 백남준은 신재덕, 이건우 등에 사사 받으며 음악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는 1947년 경기고 전신인 경기공립중학교 시절에 접하게 된 작곡가 아놀드 쇤베르그의 작품에 흥미를 느끼며 새로운 음악에 대한 열정에 눈을 뜬다. 1949년 한국전쟁이 임박하자 백남준은 가족과 함께 홍콩으로 이주하고, 1년 뒤에는 다시 도쿄로 이주했다. 백남준은 도쿄대에 입학해 음악과 미술을 공부했다. 졸업논문으로 ‘아놀드 쇤베르크 연구’를 제출한다. 이후 1956년 서양의 고전주의 및 모더니즘 음악을 공부하고자 독일로 유학을 떠난 백남준은 프라이부르크대에서 작곡가 볼프강 포트너에게 사사 받으며 음악 공부를 이어갔다. 그 이듬해 백남준은 미국의 전위음악가 존 케이지를 만났다. 원래 클래식 작곡가가 되는 것을 꿈꾸었던 백남준은 플럭서스(Fluxus)의 일원이었던 존 케이지와의 만남으로 인생에 큰 전환점을 맞이한다. 동양의 선(禪) 사상에 기반을 둔 케이지의 영향으로 서구문화를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를 갖게 된다.존 케이지를 만나 새로운 예술에 눈을 뜬 백남준은 케이지에게 바치는 퍼포먼스를 기획, 실행했다. 이를 만프레드 레베가 사진으로 기록했다. 뒤에 보이는 작품은 만프레드 레베의 ‘존 케이지에 대한 경의: 테이프와 피아노를 위한 음악’(갤러리 22, 뒤셀도르프, 20.3×25.4cm, 1959).(사진=백남준아트센터)◇ 플럭서스의 일원이 되다존 케이지에 대해 논하기 전에 먼저 플럭서스에 대해 알아보자. 플럭서스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나타난 아방가르드 예술 활동 가운데 가장 중요한 국제적인 전위예술(기존의 예술에 대한 인식과 가치를 부정하는 움직임) 운동으로 꼽힌다. 1960년대 초부터 1970년대에 걸쳐 독일과 미국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플럭서스는 반예술 운동이었으며, 특히 미술관과 수집가의 독점적인 소유물이 되는 예술에 대해서도 반대했다. 플럭서스는 ‘변화’, ‘움직임’, ‘흐름’을 뜻하는 라틴어인 플룩스(Flux)에서 유래한다. 리투아니아 출신의 미국인 조지 마키우나스가 1962년 독일 헤센주의 비스바덴 시립미술관에서 열린 '플럭서스-국제 신음악 페스티벌'의 초청장 문구에서 처음 사용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플럭서스는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과 경계를 허물고 협업했다. 실험적이고 그 자체로 큰 인상을 남긴 새로운 방식을 통해서 기존 예술이 가지고 있던 개념이나 범위를 크게 확장했다. 조지 마키우나스, 오노 요코 등과 함께 전위음악가 존 케이지, 요셉 보이스와 백남준이 이 운동을 주도한 핵심 멤버다.존 케이지는 1950년대에 4분 33초 동안 피아노 앞에 앉아 아무것도 연주하지 않는 공연을 선보였다. 이 작품명은 ‘4’ 33’이다. 존 케이지는 작가가 미리 의도한 소리보다 청중들이 객석에서 반응하는 소리를 통해 만들어진 소음이 음악이나 예술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이에 큰 감명을 받은 백남준은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부수며 전통 예술에 반기를 드는 실험적 공연을 다수 선보였다. 백남준은 독일 뒤셀도르프 소재의 한 갤러리에서 ‘존 케이지를 위한 오마주’라는 전시로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널리 알린다.울산시립미술관의 백남준 탄생 90주년 특별기획전 ‘21세기 천지창조 시스틴 채플’ 전시 전경.(사진=울산시립미술관)◇ 비디오 아트의 탄생은?플럭서스의 일원으로 기존 예술을 부정하고 새로운 예술을 만들고자 했던 백남준에게 새로운 매체가 다가온다. 바로 텔레비전이다. 텔레비전은 ‘멀리, 원격의’의 뜻을 가진 접두사 ‘tele’와 ‘시선, 시야’의 의미를 지닌 ‘vision’으로 만들어진 단어다. 19세기 말에 니프코브 원판과 브라운관이 개발되어 텔레비전의 출현을 예고했다. 1925년 영국의 베어드는 ‘텔레바이저’라는 기계식 텔레비전을 선보였다. 이후 텔레비전 사업은 1940년대 후반부터 급속히 성장했다. 한국에서 텔레비전이 일반에게 처음으로 공개된 건 1954년 7월 30일이다. 1960년대 미국의 일반 가정의 텔레비전 보급률은 90%에 달한다. 백남준은 19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텔레비전을 작업에 활용하기 시작했다. 단지 메시지 전달의 수단이 아니라 예술의 도구로 삼는 영상작업을 시도했다. 백남준은 1963년 3월 11일부터 3월 20일까지 독일 부퍼탈의 갤러리 파르나스에서 열린 자신의 첫 개인전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에 13대의 텔레비전을 등장시켰다. 텔레비전을 다양한 방식으로 변조해서 새로운 전자 이미지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비디오아트의 탄생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두 달 뒤 미국의 스몰린 갤러리에서 볼프 포스텔이 텔레비전과 카메라를 활용한 전시를 선보였다. 백남준과 볼프 포스텔은 비디오아트의 시작을 알린 1세대로 기록된다. 백남준의 부퍼탈 전시는 텔레비전의 전자적 물질성을 활용한 영상처리 기술이 관객의 참여를 거쳐 미적 의의를 획득한 최초의 전시 현장이었다. 비디오아트의 미학적인 의미는 시각예술에서 물질 개념을 떠난 빛과 음극선에 의한 전자 이미지를 구현한 것에 있다. 또한, 시간에 의한 이야기 서술이라고 하는 이질적인 개념을 정착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후 백남준은 소니 포타팩 비디오 카메라를 작업에 활용해 비디오 설치 및 비디오 퍼포먼스와 함께 비디오 조각 작품들도 선보였다. 그의 비디오 조각들로는 ‘살아있는 조각을 위한 TV 브라’(1969), ‘첼로와 비디오테이프를 위한 콘체르토’(1971), ‘TV 부처’(1974) 등이 있다. 백남준의 작품은 관객이 직접 참여하는 게 가능하다. 'TV 붓다'는 불상과 텔레비전이 서로 마주 보고 있다. 텔레비전 화면 안에는 마주 보는 불상의 모습이 그대로 나타나는 방식이다. 관람객이 이 불상 뒤에 서 있으면, 화면 안에 그 모습이 그대로 보인다. 단순히 관람객을 화면에 등장시키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관람객들이 화면 속 자신을 바라보면서 자아를 찾음과 동시에 당시 첨단 기술과 인간의 공존에 대한 고민을 담은 작품이다. 백남준은 이후 전 세계적인 미술행사에 참여하고, 권위 있는 미술관에서 전시를 열어가면서 자신의 위상을 드높였다. 1977년 제6회를 맞은 세계 최고 권위의 미술행사인 카셀 도큐멘타에서 전위예술가들과 함께 개막식 현장을 위성 중계했다. 1984년 1월 1일 백남준은 뉴욕과 파리를 위성을 이용해 실시간으로 연결해 진행한 위성 TV쇼 ‘굿모닝 미스터 오웰’로 비디오아트에 대한 대중적 공감대를 형성했다. 1993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시스티나 성당’(1993)으로 황금사자상을 수상하면서 세계적인 예술가로 인정받았다. 이후 1996년 뇌졸중으로 쓰러져 투병생활을 하면서도 2000년 미국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열린 회고전에서 높이 8m의 폭포수 사이로 초록색 레이저광선을 쏘는 ‘야곱의 사다리’(2000)를 선보였다. 울산시립미술관의 백남준 탄생 90주년 특별기획전 ‘땅의 아바타, 거북’ 전시 작품.(백남준, ‘거북’, 1993, 비디오 설치, 단채널 비디오 3점, 컬러, 무음; 모니터 166대, 재생장치 3대, 철제 구조물)(사진=울산시립미술관)◇ 백남준 탄생 90주년 기념 전시 줄이어 올해로 탄생 90주년을 맞은 백남준을 기념하는 전시가 줄지어 열린다. ‘백남준이 오래 사는 집’이라는 애칭이 붙은 백남준아트센터는 백남준 탄생 90주년 특별전으로 ‘아방가르드는 당당하다’ ‘완벽한 최후의 1초 - 교향곡 2번’ ‘'바로크 백남준’ 등의 전시를 열었다. 영국의 테이트모던 미술관으로부터 ‘시스티나 성당’(1993)을 사들인 울산시립미술관은 ‘21세기 천지창조 시스틴 채플’ ‘땅의 아바타, 거북’ 등의 전시를 개최했다. 포천문화재단과 백남준문화재단의 협력으로 ‘멀리 보다: 백남준의 TV’가 포천반월아트홀에서 열렸다. 그 외에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은 기술적 문제로 폐쇄했던 ‘다다익선’(1987)을 올해 9월 재가동했다. 대전시립미술관도 10월 개관하는 기획전에서 1993년 대전엑스포 개최를 기념해 엑스포 재생조형관에 설치했던 ‘프랙탈 거북선’(1993)의 원형을 복원해 선보인다. 1917년 마르셀 뒤샹은 미국 아트페어인 아모리 쇼에 ‘리처드 머트’라는 가명으로 남성용 소변기를 뒤집어 ‘샘’ 작품을 출품했다. 마르셀 뒤샹의 발상 전환은 현대미술의 시작이기도 하다. 백남준은 생전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마르셀 뒤샹은 비디오를 제외한 모든 것을 이루어 놓았습니다. 그는 커다란 입구와 아주 작은 출구를 만들어 놓았지요. 후자가 비디오입니다. 그곳으로 나가면 우리는 마르셀 뒤샹의 영향권 밖으로 나가는 셈입니다.”마르셀 뒤샹이 열어놓은 현대미술의 출구로 많은 예술가가 드나들었지만, 뒤샹이 열어놓은 현대미술의 영향력을 뛰어넘는 이들은 적었다. 작은 출구로 나가지 못하고 대부분 그 안에 갇혔다. 뒤샹이 전파한 현대미술의 테두리 안에서 예술을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백남준은 이와는 다르게 자신이 비디오아트를 창시해 작은 출구로 나갔다는 말이다. 오늘날 백남준이 잉태한 비디오아트는 미디어아트의 기반이 되었고, 예술사에서 새로운 장을 열었다. 우리는 백남준이 남긴 작품을 통해 그의 정신과 여전히 마주할 수 있다. 백남준이 세상을 떠난 지 16년이 흘렀지만, 작품을 통해 백남준은 계속 살아있다. △ 글=이상미 프랑스 파리 고등미술연구원 예술경영학과에서 수학했고, 파리 고등실천연구원에서 서양예술사학과 고고학으로 석사 학위, 파리 고등사회과학연구원에서 미학으로 박사과정을 밟았다. 이상아트(주) 대표이사이자 유럽문화예술콘텐츠연구소장으로도 활동 중이다. 미술계 현장에서 활발한 활동과 함께 이론과 실무를 겸비한 전문성을 갖고 있다.
- 차수정 교수, '淸, The Blue 바다를 열다' 특별 공연
- ‘淸, The Blue 바다를 열다’[이데일리 고규대 기자] 차수정 순헌무용단이 10월 1일과 2일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에서 무용창작극 ‘淸, The Blue 바다를 열다’를 무대에 올린다.‘淸, The Blue 바다를 열다’는 구전설화 ’심청전‘을 현대적 감각으로 각색한 것으로, 순헌무용단의 대표적 창작 레퍼토리다. 한국춤평론가상 ‘작품상’,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올해의 최우수예술가상 ‘연출상’, KOPIS(예술경영지원센터 공연예술통합전산망) ‘올해의 BEST 공연- 무용’ 선정작이다. 순헌무용단은 “한국의 전통적 근간을 잃지 않으면서도 현대적인 안무 감각을 통해 동시대성을 갖춘 한국형 융복합 예술 공연이다”고 말했다.‘淸, The Blue 바다를 열다’는 심청전의 주인공 ‘청’이 21세기 현대 사회에 태어난다는 상상력을 바탕으로 시작한다. ‘淸, The Blue 바다를 열다’는 무용뿐 아니라 드라마와 말의 영역을 넘나드는 작품이다. 무용수의 몸짓에 스토리가 더해지고 목소리에 감정이 실리면서 전통설화 심청전이 관객에게 현실로 다가오도록 꾸몄다. 현대인의 이기심과 소외된 소통의 감정을 창작 춤을 통해 관객과 가족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게 주요 내용이다. ‘淸, The Blue 바다를 열다’는 2020년 1st Dance Bridge Seoul Festival에서 짧은 형식의 쇼케이스로 관객을 만났다가 전문가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았다. 무용계의 관심에 힘입어 2021년에는 국립극장 달오름에서 전막 공연을 선보였다. 올해 열리는 공연은 순헌무용단의 17주년을 맞아 재정비한 형태로 꾸며진다. 이번 공연은 ‘청의 탄생’ ‘청의 죽음’ ‘청의 용궁’ ‘청의 환생’ 등의 순서로 이어진다. 순헌무용단은 “결과로 보여지는 공연보다는 과정을 보여주며 그 과정을 통해 관객과의 소통을 보여주는 좋은 작품으로 거듭나겠다”고 말했다.‘淸, The Blue 바다를 열다’순헌무용단은 2005년 차수정 예술감독(숙명대 교수)이 창단했다. 무용단의 이름은 신여성 교육에 뜻을 가진 조선왕실 마지막 황귀비인 순헌에서 따왔다. 조선왕실의 정신을 담은 한국 전통 춤과 현대적으로 해석한 창작 춤을 공존하는 가교 역할을 하겠다는 게 순헌무용단의 비전이다. 차수정 예술감독은 한영숙 제 정재만 류의 춤을 이어 실험 정신과 도전 의식을 갖고, 현 시대에 적합한 융복합 장르 무용 공연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 [이상미의 미디어아트] 미디어아트는 어떻게 탄생했을까?
- 세계적으로 미디어아트를 주도하는 팀랩의 미디아아트 전시 전경.[이데일리 고규대 기자] 최근 몇 년간 미디어아트 시장은 급성장했다. 캔버스를 벗어난 벽이나 바닥 등 다양한 공간을 도화지로 사용하는 미디어아트가 관심을 끌고 있다. 미디어아트는 메타버스와 NFT의 기술적 성장과 더불어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다. 이번 연재로 미디어아트를 가까이 접할 수 있는 전시 공간과 그 공간 속 작가들의 이야기를 다뤄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미디어아트는 우리에게 익숙하다. 각 지자체나 기업에서 공공미술로 미디어아트 작품을 설치하거나 전시하면서, 미디어아트는 대중에게 한 걸음 더 가깝게 다가서고 있다. 거리 곳곳의 전광판이나 건물 로비에서 미디어아트를 쉽게 볼 수 있다. 미디어아트가 우리에게 불쑥 다가온 건 아니다. 기술 발전에 따른 변천사를 겪으며 우리 곁으로 서서히 오게 되었다. 이제 우리에게 친숙한 미디어아트는 어떻게 탄생하고, 발전하게 되었을까? 미디어아트의 역사는 전자 매체의 발전과 궤를 같이한다. 그중에 사진과 컴퓨터의 발명은 미디어아트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대한 사건이다. 시대 발전에 따르는 과정을 함께 설명해야 하기에 연대기적 구성으로 쓴다. 역사 이야기라서 어려울 것 같다고? 전혀 그렇지 않다. 흥미진진한 미디어아트 탄생사로 초대한다.1826년 조세프 니세포르 니에프스(1765~1833)가 작업실 창가에서 8시간의 노출 끝에 완성한 ‘르 그라의 집 창에서 본 조망’. 최초의 사진으로도 본다.◇19세기 : 미디어아트의 태동기미디어아트가 등장하게 된 배경에는 사진의 발명이 있다. 때는 19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제2차 산업혁명 시기다. 증기기관의 발명으로 사람들이 공장으로 몰려들면서 근대적인 의미의 도시가 등장하고, 신문이라는 대중매체의 영향력이 커졌다. 1822년 프랑스에서 오페라 무대나 디오라마관에서 그림을 그리는 화가였던 루이 다게르(1787~1851)는 무대효과를 위해 디오라마 기법을 고안하면서 자신만의 사진 발명을 연구하고 있었다. 4년 뒤인 1826년 프랑스의 발명가이자 사진가인 조세프 니세포르 니에프스(1765~1833)가 작업실 창가에서 8시간의 노출 끝에 ‘르 그라의 집 창에서 본 조망’을 최초의 사진으로 완성했다. 니에프스는 ‘햇빛이 그린 그림’이라는 뜻으로 ‘헬리오그래피’라고 명명했다. 노출 시간이 8시간이나 걸린 이유는 감광도가 매주 낮았기 때문에 긴 시간 동안의 빛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1828년 초에 다게르는 니에프스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둘은 1829년 동업자가 되어 사진 발명을 위해 공동 연구한다. 하지만 니에프스는 4년 뒤에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났고, 다게르는 홀로 니에프스의 헬리오그래피를 계속 연구해갔다. 드디어 1839년 8월 19일 프랑스의 과학아카데미와 미술아카데미가 합동으로 연 회의에서 다게르는 이미지를 정착시키는 독자적인 사진 기술인 다게레오타입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최초의 사진이 완성된 건 1826년이지만, 역사는 1839년을 사진의 시작으로 보기도 한다. 진정한 사진의 발명을 이뤄냈다는 의미에서다. 이로써 이미지의 기계적인 재현과 복제, 그리고 이미지의 대량 보급이 가능해졌다. 수천 년에 걸쳐 자연과 사물, 인물을 똑같이 그려냈던 회화는 재현하는 역할을 끝내고, 대변화를 맞이하기도 했다. 카메라를 이용하여 움직임을 기록하고자 하는 시도는 1870년대 직접 인화 방식인 ‘크로노포토그래피’라는 촬영법을 탄생시켰다. 이는 영화 발명의 계기가 되었다. 1895년 대중문화의 형태로써 영화가 탄생했다. 미디어아트의 토대를 이루는 사진과 영화는 19세기에 만들어졌다. 그러나 아직 미디어아트가 탄생한 건 아니다. 엄마 배 속에 있을 때다. 그래서 미디어아트의 태동기다.다게르가 1838년 파리 거리에서 다게레오타입으로 10분의 이상의 노출로 촬영한 ‘파리 성당의 큰 거리’. 사진 오른편 아래에 구두를 닦고 있는 신사를 찾을 수 있다.◇ 20세기 전반기(1900~1950) : 미디어아트의 탄생기20세기 초에 세계는 제1차 세계대전과 대공황 시기를 맞으며 격변의 시기를 보냈다. 영화산업에서 유럽 국가들은 타격을 입게 되고, 대신 미국의 할리우드가 세계 영화산업의 중심으로 발전한다. 예술계에서 푸대접받았던 영화는 1930년대에 이르러서야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전시되면서 비로소 예술의 괘도에 올라선다. 1940년대에 전쟁은 또 일어난다. 하지만 두차례의 세계 대전 같은 전쟁 시기에 군대는 암호해독 기술 발전을 해야 했다. 이는 컴퓨터 기술의 발전을 이끌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은 독일군의 암호 해독과 관련해 각종 공학 기술의 발전을 요구했다. 공학 기술은 지식이나 과학의 집합체로 인식되었다. 대표적인 예로 영국의 과학자인 앨런 튜링(1912~1954)은 오늘날 컴퓨터의 기본 원리가 되는 튜링 머신의 개념을 정립했다. 조금 뜬금없는 이야기이지만 애플의 로고가 왜 한 입 베어 문 사과인지 아는가? 튜링은 1954년 42세의 젊은 나이에 당시 영국에서 불법이었던 동성애로 인한 외설 혐의로 유죄 판결받은 후 청산가리를 주사한 사과를 깨물어 먹고 사망했다. 그래서 애플이 튜링을 추모하기 위한 의미로 한 입 베어먹은 사과를 로고에 담았다는 속설이 있다. 튜링 머신은 기술 발전을 촉진하면서 세계 최초의 컴퓨터인 에니악(ENIAC)이 1946년 미국 펜실베니아 대학에서 만들어졌다. 그로부터 5년 뒤인 1951년 최초의 전자 컴퓨터인 유니박(UNIVAC)이 특허받아 상용화되었다. 군사기술과 연관된 연구소를 중심으로 컴퓨터의 가능성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이 실험 중에 일부는 예술 분야인 음악이나 미술과 관련해서 진행되었다. 예술가와 음악가들이 연구에 참여하기도 했다. 1965년 소니가 개발한 휴대용 비디오카메라인 포타팩◇ 20세기 후반기(1960~2000):미디어아트의 성장기1950년대까지만 해도 미디어아트와 관련해 작품을 선보인 이들은 대부분 예술가가 아닌 과학자나 엔지니어들이었다. 그렇다면 예술가들이 본격적인 미디어아트를 만든 건 언제부터일까? 바로 1960년대이다. 1960년대에는 미국의 TV 소유 가구 비율이 90%에 이르게 되며, TV 방송국들이 급성장하게 된다. 1965년 소니 포타팩 같은 휴대용 비디오카메라가 시장에 출시되었다. 그러자 예술가들은 기계 매체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예술가로는 백남준의 스승인 존 케이지(1912~1992)가 있다. 그는 예술가와 관객의 상호작용성, 멀티미디어 그리고 일렉트로닉스를 예술에 응용하기 시작했다. 울프 포스텔, 백남준은 TV와 비디오카메라를 최초로 예술에 사용했다. 이 당시 미디어아트는 획기적이고 반항적인 장르로 인식되었으나, 예술 장르로 편입되지도 못하고 기술적 요소도 부족했다.1970년대 초에 들어서면서 비디오카메라를 활용한 비디오아트는 하나의 장르로서 연구되기 시작했다. 비디오카메라는 촬영 즉시 재생이 가능하다. 또 모니터 그 자체를 하나의 오브제로 활용하여 예술적인 실험을 전개할 수 있었기에 예술가들은 비디오카메라를 들었다. 이 당시 한국 비디오아트의 선구자들은 전위적 실험미술의 맥락에서 비디오를 사유와 창작의 도구로 주목했다. 1990년대 이후 매체 환경의 변화로 인해 비디오아트의 영향력은 감소하고, 대신 컴퓨터를 기반으로 한 미디어아트의 영향력이 증가했다. 레이저, 조명시스템도 예술 작품에 쓰였다. 1990년대 중반부터 빔프로젝터의 성능이 높아졌고, 가격 또한 저렴해지면서 전시장에서 미디어아트 상영의 도구로 전용되기 시작했다.세계적으로 미디어아트를 주도하는 팀랩의 미디아아트 전시 전경.◇ 21세기 : 미디어아트의 전성기2000년대부터 널리 보급된 인터넷의 확산은 세계를 하나로 연결하는 계기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인터넷이 대중화되고, 게임이 보급되고, 스마트폰이 상용화되면서 미디어아트의 소재도 다양해졌다. 기술 발달에 따른 다양한 대중매체가 예술에 적극적으로 활용되면서 다양한 유형의 미디어아트가 만들어지고 있다. 이제 확연히 한 자리를 잡은 미디어아트는 동시대 예술을 대표하는 흐름이 되었다. 다음 편에서는 미디어아트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지위를 획득하고 비디오아트의 창시자라고 불리는 세계적인 예술가 백남준을 만나러 가자. △ 글=이상미 프랑스 파리 고등미술연구원 예술경영학과에서 수학했고, 파리 고등실천연구원에서 서양예술사학과 고고학으로 석사 학위, 파리 고등사회과학연구원에서 미학으로 박사과정을 밟았다. 이상아트(주) 대표이사이자 유럽문화예술콘텐츠연구소장으로도 활동 중이다. 미술계 현장에서 활발한 활동과 함께 이론과 실무를 겸비한 전문성을 갖고 있다.
- 무용가 정승희, 77세 맞아 자신의 춤 역사 무대에 올린다
- ‘77 정승희, 춤의 여정-춤의 노래’[이데일리 고규대 기자] 무용가 정승희가 77세를 맞아 자신의 이름을 딴 ‘정승희 무용단’과 함께 기념 공연을 연다.정승희는 29일과 30일 오후 7시30분 서울 국립극장 달오름에서 ‘77 정승희, 춤의 여정-춤의 노래’을 무대에 올린다. 이번 공연은 평생 춤의 길을 걸어온 자신의 여정을 뒤돌아보며, 77세 기념의 의미를 춤의 노래로 풀어낸다. 우리 춤의 심미적 깊이를 추구하고자 시를 무용적 문법으로 창조한 자신의 독창적인 예술세계를 펼쳐낸다. 공연 프로그램은 ‘물 위에 쓴 시’ ‘고로초롬만 살았으면 싶어라’ ‘승무’(한영숙류) ‘비천사신무 중 네 별, 네 신(神)’ 등이 있다. 또 2022 신작 ‘오호 통재라...’라는 작품을 통해 시들지 않은 춤에 갈구를 표현할 예정이다. 정승희는 그동안 함께했던 동아무용콩쿠르 대상 및 금상, 국제콩쿠르 1등 출신의 제자들과도 무대를 펼쳐낸다. 또 그 제자가 한국예술종합학교에 교수가 되어 펼쳐내는 무대를 구성해, 세대를 이어 전해지는 대한민국 예술교육 및 예술세계의 흐름을 보여준다.이번 무대에는 예술감독 및 안무 정승희, 총 연출 염현주, 지도 이은영·장혜림 등이 참여했다. 염현주·안덕기·윤호정·조재혁·이은영·박한울·박상주·최현정·장혜림·김아람·박철순 등이 춤사위를 보여준다. 무용가 정승희.정승희는 무용전문교육을 받은 1세대다. 이화여자대학교 무용학과 1기 출신으로 27세의 젊은 나이로 상명대학교 교수로 발탁됐다. 이후 1996년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교수로 재직하면서 세계적인 무용가를 배출하는 무용전문 교육의 기틀을 마련하였고, 전통춤 계승과 창작춤의 폭넓은 예술세계를 펼쳐냈다.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고 한국예술종합학교 명예교수를 역임했다.이번 공연은 대한민국예술원 2022 창작지원 공연으로 전석 초대로 관객을 만난다. 사전 예약을 통해 관람할 수 있다.
- 조남규 대한무용협회 이사장, 문화재청 무형문화재위원 선임
- 조남규 한국무용협회 이사장[이데일리 고규대 기자] 조남규 대한무용협회 이사장(상명대학교 교수)가 문화재청 문화재위원으로 재임됐다.조남규 이사장은 문화재청 무형문화재위원회 위원으로서 3개 분야(전통예능, 전통기술, 전통지식) 중 전통 예능 분야의 무형문화재 정책과 국가무형문화재 및 보유자, 보유단체의 지(인)정 및 해제,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선정 등에 관한 주요 사항을 심의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조남규 이사장은 한양대학교 무용학과와 동 대학원에서 석박사를 취득하였고 무용과 공연예술의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면서 폭넓은 경험을 쌓았고 2017년에 제22대 (사)대한무용협회 이사장으로 취임하였다. 서울무용제, 전국무용제, 대한민국무용대상 등 우리나라 무용제의 질적 향상과 대중화에 기여하는 등 기획력과 추진력이 높다는 평을 받는다. 서울시와 협업하여 무용분야 뉴딜일자리 창출에 성공했고 코로나19로 장기간 어려움에 놓인 전국의 많은 무용 단체와 예술가 지원사업을 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와 함께 추진해 좋은 성과를 이뤘다. 또 무용가들이 예술 활동 지원을 위한 락토 댄스프로젝트(Locto Dance Project)를 추진해 지난 해 약 850명에게 공연 출연료를 지원했다. 예술가 복지를 위해 어려운 환경에 있는 원로, 중견, 젊은 무용가들을 위한 임대주택 제공 등에 관심을 두어 서울시를 비롯한 공공기관과 꾸준한 논의를 하고 있다. 조남규 이사장은 취임 초기부터 기존의 전통 무용뿐만 아니라 알려지지 않은 우수한 전통 무용들이 사장되지 않고 후학에게 전승될 수 있도록 명작무를 지정, 이의 활성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조남규 이사장의 임기는 6월 14일부터 2024년 6월 13일까지 2년이다.
- '물의 화가' 안영일, 하퍼스 갤러리와 함께 내년 한국 찾는다
- CALIFORNIA J 1, 1998, Oil on canvas, 48×52 inches[이데일리 고규대 기자] 한국의 대표작가 안영일이 내년 하퍼스 갤러리(Harper’s Gallery)와 함께 고국을 찾는다.하퍼스 갤러리는 내년 3월 미국 뉴욕에서 전시에 이어 서울에서 열리는 프리즈(Frieze)와 한국국제아트페어(KIAF)가 함께하는 아트페어 전시까지 미국과 한국을 잇는 안영일 프로젝트 전시를 기획 중이다. 하퍼스 갤러리는 미국 LA, 뉴욕에 터 잡고 있는 글로벌 갤러리다. 이번 전시회에서 ‘물의 화가’로 불리는 안영일 작가의 대표 시리즈인 ‘물’ 시리즈가 대거 선보일 예정이다. 하퍼스 갤러리는 한국과 미국에서 약 30회의 개인전을 가진 안영일 작가를 한국의 대표작가로 주목도를 높이기 위해 다양한 이벤트를 기획 중이다. 2015년 이후 미국에서 그의 작품 세계가 재조명되면서 역으로 한국에서 또 다른 전성기를 구가하는 안영일 작가를 새삼 조명하겠다는 의도다. 앞서 10월 열린 KIAF에서 갤러리 세솜을 통해 선보인 ‘물’ 시리즈 전시가 아트뉴스 선정 ‘10대 베스트 부스’로 꼽힐 만큼 주목받기도 했다. 아트뉴스는 “인내심이 강한 화가로, 한 색이 다른 색의 언더페인팅을 천천히 가리는 세심한 표시로 빛나는 추상 캔버스 마크를 쌓은, 인내심이 강한 화가(a painter of patient virtuosity, building his luminous abstract canvases mark by careful mark, one color slowly typically covering an underpainting of another color)라고 평했다.마에자와 유사쿠가 구입 소장하고 있는 ‘WATER YLWG’(17 / 66×82 inches) 작품 앞에 앉아 있는 안영일 작가.안영일 작가는 1934년 개성에서 서양화가 안승각의 아들로 태어나 2020년 12월 미국 LA에서 세상을 떠났다. 어린 시절 부모님을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 살았다. 이 무렵부터 타고난 재능과 감성으로 천재 소년화가라 불리기도 했다. 10세 때 귀국해 청주사범 부속 초중고등학교에서 공부하고 1958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했다. 고등학교 시절 제2회 국전에 참여해 특선을 받았으나 참가할 수 없는 나이라는 게 드러나 입선으로 내려진 일화도 유명하다. 대학 졸업 후 이화여고와 서울 사대부고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활발한 작품 활동도 했다.안영일 작가는 1966년 미국으로 이주 후 캘리포니아의 자연풍광에 빠져 이곳에 머물면서 더 깊고 다양한 작품 세계를 이어갔다. 1967년 재커리 월러(Zachary Waller) 갤러리와 전속 계약을 맺고 도약했으나 1970년대 들어서 자신의 작품을 두고 갤러리와 컬렉터 간에 소송이 벌어지면서 10년 남짓 방황의 시간을 보냈다. 이혼, 우울증 등으로 경제적 파산까지 겪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당시 안영일 작가는 작은 낚싯배에 몸을 싣고 거의 매일 바다에서 낚시를 하면서 마음을 달랬다. 안영일은 “햇빛이 부서지고 물에 반사되면서 순간마다 오색영롱하게 반짝인 색들이 겹겹이 퍼져”나가는 바다를 보고 “그저 푸른색인 것 같은 하늘과 바다 안에 너무 많은 색들이 있었다”는 걸 느꼈다. “출렁이는 파도와 절멸하며 계속 변화하는 색들이 훗날 ‘물’ 시리즈가 되어 화폭에 담기게 되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다.(‘오늘도 그림이 나에게 오다’·136쪽·안영일 저)30대 중반부터 40대 중반까지 화가의 황금기다. 그런 시절 바다 고깃배 위에서 보내던 안영일은 1980년대 들어서 다시 작품 활동을 점차 시작했다. 안영일은 1983년부터 시작한 ‘물(Water)’ 시리즈로 재기에 성공했다. 캘리포니아에 머물면서 “아름다운 색채와 형체로, 그리고 살아있는 자연의 소리의 파동”을 화폭에 담기 시작했다.(‘오늘도 그림이 나에게 오다’·151쪽) 이 감정은 ‘캘리포니아’로 이름 붙인 연작으로 태어났다. 이후 1996년 LA 존앤조 갤러리에서 ‘캘리포니아’ 시리즈로만 전시회를 열었다. 이 무렵부터 안영일은 10년 넘는 기간 벗어나 있던 세상에 다시 들어섰다. 2001년 재혼으로 안정을 찾으면서 활발한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2002년에는 미국 국무부 ‘미술대사’로 발탁돼 ‘선셋’ ‘스페이스’ 등 2개 작품을 미국 해외 공관에서 대여하기도 했다.안영일 작가의 대표 시리즈인 ‘물(WATER)’ 시리즈의 갤러리 세솜 전시 전경 .(사진=세솜갤러리)안영일은 2013년 뜻하지 않은 뇌졸증으로 투병하는 와중에도 붓을 들었다. 2015년 1월 LA한국문화원에서 회고전 ‘안영일: 물과 빛의 변주곡’을 시작으로 같은 해 2월 롱비치 미술관(Long Beach Museum of Art)에서 초대전을 열었다. 몇몇 아트페어와 옥션에도 작품을 출품했고, 팜스프링스 아트페어를 시작으로 부산 화랑미술제, KIAF 2015에서 모두 화려한 조명을 받았다. 2016년과 2017년 LA 아트쇼에서 두 차례에 걸쳐 한국 단색화 특별기획전에 초대됐다. 2018년 시카고의 카비 굽타(Kavi Gupta) 갤러리에서 열린 전시가 생전 마지막 개인전이 됐다. 안영일은 자신의 저서에서 “가장 기쁜 일은 2016년 미국 서부지역 최대 미술관인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LACMA·라크마 미술관)이 대작 ‘물(Water SZLB15, 2015)’을 뮤지엄 컬렉션으로 소장한 것, 그리고 2017년 3월부터 7개월간 라크마 한국미술 갤러리에서 나의 작품전시회가 열린 일이었다”고 회상했다. 2017년 3월에는 한국을 떠나온 지 50년, 한국에서 개인전을 연지 30년 만에 현대화랑에서 초대전을 열었다. 안영일은 한국에서 태동한 한국작가 고유의 것으로 알려진 단색화, 그것도 미국 LA에서 자생한 단색화 화가라는 점에서 주목받았다. 평론가 윤진섭은 2015년 미국 LA 스튜디오를 찾아 안영일의 작품을 살펴본 후 미주 한인언론과 인터뷰에서 “수십년 동안 한국 작가들과 교감이 없었는데도 같은 계열의 작품을 해왔다는 사실이 경이롭다”면서 안영일의 ‘물’시리즈는 분명한 단색화라고 단언했다. 안영일 작가의 ‘물’ 시리즈의 한 작품을 확대한 모습. “힘의 강약과 나이프로 물감을 밀 때의 방향에 따라 서로 다른 표정을 짓는다.”(평론가 윤진섭)안영일 작가의 ‘물’ 시리즈는 멀리서 보면 하나의 색으로 덮인 그림 같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엄지손톱만한 사각형의 점이 모자이크처럼 이어져 또 다른 감동을 뿜어낸다. 물감을 일정한 크기로 캔버스에 페인팅 나이프로 올리는 기법이 평면화에 입체적 생동감을 준다. 물감이 흐르다 멈춘 듯 끝 부분이 곧추선 질감은 바늘처럼 날카롭게, 혹은 미세한 파도처럼 여러 겹으로 시선을 사로잡는다. 평론가 윤진섭은 이를 ‘촉각성 성질’로 규정하면서 “알맞은 정도로 갠 유성물감을 나이프로 찍어 캔버스에 바를 때 주어진 힘에 밀려서 사각형의 가장자리에 머무는 진득한 물감의 덩어리들이 독특한 마티에르를 형성한다”(평론 ‘색과 빛으로 가득 찬 조화의 세계’)고 적었다.안영일은 “내가 다른 단색화 작가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나는 ‘물’ 외에 다른 시리즈의 작업도 계속해왔다는 것이다”고도 말했다.(‘오늘도 그림이 나에게 오다’·51쪽). 그의 대표 연작 시리즈는 ‘캘리포니아(California)’·‘우산(Um-brella)’·‘앳 더 비치(At The Beach)’·‘새(Birds)’·‘뮤지션(Musician)’ 등도 있다. 평론가인 정숙희(전 미주한국일보 부국장)는 “평생 사각의 캔버스가 그의 세상이었다. 그가 그림이요, 그림이 곧 그이기 때문이다”고 평했다.
- 차수정 순헌무용단 예술감독 "실험적 레퍼토리로 대표 브랜드 만들겠다"
- ‘한지 위의 우리 춤’에서 춤사위를 선보이는 차수정 순헌무용단 예술감독.(사진=순헌무용단)[이데일리 고규대 기자] 한국 전통을 기본으로 한 춤을 무대에 올린 지 하루 만에, 실험적인 융복합 무용으로 관객을 만난다. 전통과 현대를 넘나드는 장르를 연이어 선보이는 이색적 도전. 차수정 순헌무용단 예술감독(숙명여대 무용학과 교수)가 그 도전의 주인공이다. 차수정 예술감독은 “2년에 한번 신작 무용을 공개한다는 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일정을 짜다 보니 의도치 않게 벌어진 상황”이라고 설명했다.차수정 감독은 8일과 9일 서울 국립극장 달오름에서 ‘한지 위의 우리 춤’에 이어 11일 ‘淸, The Blue 바다를 열다’를 무대에 올린다. ‘한지 위의 우리 춤’은 살풀이·승무 등 한국 전통춤을 기본으로 한 공연이다. ‘淸, The Blue 바다를 열다’는 구전설화 ‘심청전’을 현대적 감각으로 각색한 작품이다. ‘한지 위의 우리 춤’은 전통 춤을 조명, 그림, 향기 등을 활용한, 이른바 3D 융복합 공연이다. ‘淸, The Blue 바다를 열다’는 무대에 선 무용수가 연기뿐 아니라 노래까지 부르는 실험적 작품이다. 2020년 ‘1st Dance Bridge Seoul Festival’에서 30분 남짓 짧은 쇼케이스로 공개한 작품을 순헌무용단 창단 16주년을 맞아 정식 작품으로 만들어 무대에 올렸다.‘한지 위의 우리 춤’에서는 7~8미터 길이의 한지를 무대 뒤편에 설치하고 공연이 진행되는 내내 고일두 화가가 즉흥적으로 그림을 그리는 한국 춤의 정신을 녹여내는 현장감 넘치는 퍼포먼스도 펼친다.(사진=순헌무용단)“‘한지 위의 우리 춤’에 실제 나비가 날아다니고 향기가 무대로 퍼지는 순서가 있어요. 선친 묘소를 찾았다가 배추흰나비가 제 어깨에 앉았을 때 ‘아, 아버지가 오신 것일까?’ 뭉클했던 기억이 있어요. 나비가 이승과 저승을 잇는 개체 같았죠. 그래서 실제 살아있는 나비를 무대에 등장시켜 삶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죠.”차수정 예술감독은 ‘한지 위의 우리 춤’의 레퍼토리 ‘화조풍월’ 순서에서는 객석에 향기를 뿌리기도 하고, ‘淸, The Blue 바다를 열다’에서 무용수가 심청을 부르는 장면을 춤과 연기뿐 아니라 소리까지 내도록 유도하기도 했다. 차 감독은 “춤만 추던 무용수가 즉흥적으로 소리를 낼 때마다 막혀 있는 예술적 감성이 터지는 느낌”이라고 표현했다.차수정 예술감독은 한국 전통춤을 기본으로 융복합 공연을 무대에 올리면서 자신만의 철학을 세웠다. 한국 전통춤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춤의 형식뿐 아니라 정신을 녹여내야 한다는 것이다. ‘한지 위의 우리 춤’에서 무대 뒤편에 7~8미터 길이의 한지를 설치하고 한지 위에 붓을 활용한 그림을 그리는 이벤트를 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 조명 등 무대 곳곳에 전통춤의 정신을 녹여내기 위해서 노력했다. ‘淸, The Blue 바다를 열다’는 무용뿐 아니라 드라마와 말의 영역을 넘나드는 작품이다. 무용수의 몸짓에 스토리가 더해지고 목소리에 감정이 실리면서 전통설화 ‘심청’이 관객의 현실로 다가오도록 꾸몄다. 차수정 예술감독은 “전통춤의 계승과 대중화는 함께 가야 하지만, 대중화를 위해서 전통춤을 바꿀 수는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淸, The Blue 바다를 열다’는 구전설화 심청전의 캐릭터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위트있는 작품으로 구성해 전 연령층을 아우르는 공연으로 꾸몄다는 게 순헌무용단의 설명이다.(사진=순헌무용단)차수정 감독은 2005년 순헌무용단을 창단했다. 무용단의 이름은 신여성 교육에 뜻을 가진 조선왕실 마지막 황귀비인 순헌에서 따왔다. 조선왕실의 정신을 담은 한국 전통 춤과 현대적으로 해석한 창작 춤을 공존하는 가교 역할을 하겠다는 게 순헌무용단의 비전이다. 차수정 예술감독은 한영숙 제 정재만 류의 춤을 이어가고 있다. 숙명여자대학교의 교수였던 고 정재만 인간문화재의 뜻을 이으면서 한국 춤의 방향과 창작 춤의 방향을 제시하는 게 목표다. 그 작업의 일환으로 선조의 철학과 사상이 담긴 전통춤을 새롭게 재해석하여 ‘금옥만당’·‘일곱개의 산’·‘바다위의 푸른 달’·‘물빛이 하늘빛을 닮을 제’ 등 새로운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 차수정 예술감독은 지난 7월에는 벽사전통춤보존회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벽사는 차수정 예술감독이 이어가고 있는 고 한영숙 선생의 호다. 고 한영숙 선생의 춤은 담백미와 절제미가 특징이다. 화려한 기교를 줄이고 가장 간결한 몸의 언어로 표현하려고 한다. 차수정 예술감독은 “코로나로 침체된 우리 감각을 이번 체험형 공연으로 자극하는 경험을 제공하겠다”면서 “앞으로 결과로 보이는 공연보다는, 과정을 보여주며 그 과정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는 공연으로 나서겠다”고 말했다.
- 10회 맞은 KG·이데일리 레이디스오픈…사랑의 버디 누적 기금액 4억 2025만원 돌파
- 곽재선 KG·이데일리 회장이 5일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써닝포인트 컨트리클럽에서 열린 ‘제10회 KG·이데일리 레이디스 오픈’ 시상식에서 고규대 이데일리 문화재단 사무국장에게 사랑의 버디 상금을 전달하고 있다. (사진=이데일리 스타in 방인권 기자)[용인(경기)=이데일리 스타in 임정우 기자]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 제10회 KG·이데일리 레이디스오픈(총상금 7억원)에서 ‘사랑의 버디’가 누적 기금 4억2025만원을 돌파했다. KLPGA 투어 최초로 골프를 통한 나눔 실천에 앞장서온 KG·이데일리 레이디스 오픈의 사랑의 버디는 올해도 계속됐다. 사랑의 버디는 버디 1개당 5만원, 이글과 홀인원은 버디 2개로 계산해 10만원씩 적립하고 있다.2011년 1회 대회부터 시작된 KG·이데일리 레이디스 오픈은 ‘첫해 3325만원(버디 665개)을 시작으로 2012년 3250만원(버디 650개), 2013년 3280만원(656개), 2014년 3295만원(659개), 2015년 5115만원(1023개), 2016년 5840만원(1168개), 2017년 5570만원(1114개), 2018년 4375만원(875개), 2019년 3695만원(741개)을 적립했다.화창한 날씨 속에서 진행된 이번 대회도 첫날부터 많은 버디가 쏟아졌다. 첫날에는 홀인원 1개와 이글 1개, 버디 372개가 나왔다. 둘째 날에는 홀인원 1개와 버디 299개, 셋째 날에는 이글 1개와 버디 177개가 기록됐다. 사흘간 집계된 홀인원 2개와 이글 2개, 버디 848개로 4280만원이 적립됐다. 이번 대회에 출전했던 선수들 대부분이 사랑의 버디에 동참한 것에 대한 자부심을 느꼈다. 최종합계 15언더파 201타로 우승을 차지한 김수지는 “버디를 잡을 때마다 기부한다는 게 정말 뜻깊은 것 같다”며 “내년엔 더 많은 버디를 낚아채는 걸 목표로 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 2021 대한민국무용대상 9월10일 본선...무관중 생중계
- 대한민국무용대상[이데일리 고규대 기자] ‘2021 대한민국무용대상’ 본선이 9월 10일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극장 용에서 개최된다. 본선은 애초 지난 21일 서울 예술의전당 야외무대에서 개최될 예정이었으나 코로나19의 급격한 재확산 여파로 일정과 장소를 변경했다. 주최 측은 안전을 위해 무 관객 생중계로 진행할 예정이다.올해 본선에는 전통 무용과 창작무용, 현대무용, 창작 발레 등 총 12개 팀이 진출했다. 진출팀은 한국 전통 무용 1개 단체, 한국창작무용 6개 단체, 현대무용 4개 단체, 창작 발레 1개 단체다. PJH Dance Company, 서울교방, 러프아트그룹, 박시종무용단, 댄스&컬쳐WISDOM, 서울시티발레단, 오혜순무용단, 코리안댄스컴퍼니결, 밀물현대무용단, 안귀호춤프로젝트, 컴퍼니KAN, 손미정 무용단 등이다. PJH Dance Company(안무 박종현)의 ‘모시는 사람들’은 전통 장례문화를 새롭게 조망하기 위해 다양한 장르의 활용한 작품이다. 서울교방(안무 김지영)의 ‘결’은 옛 춤인 검무를 현재의 검무로 새롭게 부활시킨 작품이다. 러프아트그룹(안무 박민지)의 ‘To wait’은 사뮈엘 베케트의 ‘무엇을 그토록 기다리고, 오매불망인가?’에 대한 질문에서 출발한 작품이다. 박시종무용단(안무 박시종)의 ‘춤타올라’는 끝없는 춤의 길을 걸어가는 삶에 대한 고찰과 성찰을 작품으로 풀어내고자 했다. 댄스&컬쳐WISDOM(안무 박지혜)의 ‘환영’은 ‘사후세계가 끝이 아닌 환상적인 세계로의 입문일 수 있겠다’는 상상에서 비롯된 작품이다. 서울시티발레단(안무 김광진)의 ‘대한민국 명품 발레 극 - 효녀 심청’은 전래동화에 현대적 요소와 판타지적 요소를 차용하여 전통예술과 발레의 크로스오버 작품이다. 오혜순무용단(안무 김종덕)의 ‘고백’은 안무자의 과거에 대한 반성이자 성찰을 담아냈다. 코리안댄스컴퍼니결(안무 이동준)의 ‘푸다꺼리’는 탈색된 행복과 절망으로 치장된 허물을 벗고 치유를 통해 탄생하는 ‘새로운 마음’의 탄생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밀물현대무용단(안무 박관정)의 ‘Reboot:출발점 위에 서다 2.0’은 빠르게 변화하는 온택트(Ontact)시대에서 각자의 방향으로 새로운 재시작을 준비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작품에 담았다. 안귀호춤프로젝트(안무 안귀호)의 ‘하루 : 레종 데트르_raison d’etre‘는 독일 철학자 라이프니츠의 사유 법칙의 하나인 ‘존재의 이유’에서 시작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컴퍼니KAN(안무 안남근)의 ‘NO.5’는 베토벤 교향곡 5악장의 주제를 춤으로 재해석하여 동시대인들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전하고자 하는 작품이다. 손미정 무용단(안무 손미정)의 ‘樂 - 살아있는 심혼을 위하여’는 혼돈의 세상 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춤의 향기로 치유를 건네고자 한 작품이다.주최 측은 심사위원을 전문심사위원 80%, 시민심사위원 20%로 구성하고, 전자집계시스템을 통해 실시간으로 점수가 공개되는 ‘공개형 경연 프로세스’를 도입했다. 1위에는 대통령상을 준다. 본선 1, 2위가 경연하는 결선과 시상식은 12월 10일 종로구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열린다.‘2021 대한민국무용대상’은 사단법인 한국무용협회(이사장 조남규 상명대학교 교수)가 주최하고, 대한민국무용대상 운영위원회가 주관한다.
- 무용협동조합연합회 7월6일 창립 총회...4개의 무용협동조합 한자리에
- [이데일리 고규대 문화산업전문기자] 무용협동조합연합회가 오는 7월6일 서울 양천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창립 총회 및 창립식을 연다.무용협동조합연합회는 4개의 무용협동조합(발레·현대무용·한국무용·한국전통무용)과 35개의 독립 무용 단체가 연합한 단체다. 이들 단체는 공연예술의 기초가 되는 순수 무용의 가치 창출과 기회 확대를 통하여 무용 생태계의 변화와 발전을 모색하고 무용가의 권익 보호를 위해 뭉쳤다. 이번 창립 총회는 무용협동조합연합회가 주관·주최하고 양천문화재단과 발레STP협동조합, 한국무용협동조합‘춤에든’, 현대무용협동조합COOP CODA, 대한민국전통무용협동조합KTDC가 후원한다. 무용협동조합연합회 측은 “현장 중심의 새로운 패러다임의 전환을 통해 투명하고 건전한 무용 사회를 구현하고 무용예술인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마련됐다”면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무용 문화의 창달과 국제교류 및 예술문화 발전에 기여하고 무용인의 권익 신장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무용협동조합연합회는 대한민국전통무용협동조합 KTDC 김진원 이사장이 회장을, 현대무용협동조합 COOP CODA 김성한 이사장이 상임 부회장을 맡았다. 발레 STP 협동조합 김길용 이사장과 한국무용협동조합 ‘춤에든’ 김종덕 이사장이 부회장을 맡는다. 이들은 현장 무용 시스템의 활력을 불어넣는 안정적인 인프라를 구축하고 이를 통해 각 무용협동조합의 복지 및 발전을 위해 다양한 문화예술 사업을 전개할 에정이다. 무용협동조합연합회는 ‘무용의 활성화와 시장 규모 확장’, ‘교류협력을 통한 동반성장’, ‘무용의 대중화’, ‘무용 문화의 건강한 생태계 조정’, ‘국제교류 및 세계무대 진출의 확장’, ‘무용의 미래 발전을 위한 비전과 방향 제시’ 등을 사업 추진 방향으로 잡았다. 무용협동조합연합회 설립에 참여한 35개 단체는 발레STP협동조합의 와이즈발레단, 이원국발레단, 김옥련발레단, 서울발레시어터, 유니버설발레단, SEO(서)발레단, 한국무용협동조합‘춤에든’의 김종덕 창작춤집단 木, 한효림Han댄스프로젝트, Group 춤 in, 박시종 무용단, 김진미 풍유무용단, 김윤희 Move180 Dance company, 김진아 무용단, 마홀라 컴퍼니, Gals 정명훈무용단, 댄스컴퍼니 더붓, 현대무용협동조합COOP_CODA의 세컨드네이처 댄스컴퍼니, 오! 마이라이프무브먼트, EDx2무용단, 트러스트무용단, 고플린파티, STL ART프로젝트, 엠비규어스, 파사무용단, 로댄스프로젝트, Project S, 에스디아트엔코, 대한민국전통무용협동조합KTDC의 춤추는사람들, 황순임무용단, 한뫼국악예술단, 이미숙도듬무용단, 박수경무용단, 김명신무용단, 류무용단, 수앤단댄스컴퍼니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