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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년을 충성을 바쳐 일했는데 지금 되돌아보면 허상을 쫓고 있었던 것 같아.” 오랫동안 기자와 취재원 사이로 만났던 모 대기업 A부장이 어느 날 저녁 술자리에서 고개를 숙였다. 언제나 안광이 또렸했던 그의 눈빛이 그렇게 허무하게 변한 건 처음이었다.
A부장은 2023년 말 희망퇴직했다. 임원의 꿈을 쫓아 20년간 쉼없이 일해온 그에게 ‘경영효율화’란 명분의 희망퇴직은 어떤 의미였을까. 그는 얘기했다. “사회생활을 한 이후 나에게 보람과 희망을 준 것도, 이런 크나큰 상실감을 준 것도 모두 회사였다.” 자신의 청춘을 바친 회사와 헤어진다는 것이 A부장에겐 가장 큰 벌이자, 상실이었던 거다.
경제지 기자를 하면서 만나왔던 대기업의 부장들은 언제나 빈틈이 없었다. 대부분 ‘기업의 꽃’인 임원을 바라보는 부장들에게 회사는 인생 그 자체다. 그들은 회사와 헤어진다는 것 자체를 그간의 인생과 자신의 존재가치가 부정당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만큼 회사에 대한 ‘로열티’가 강한 집단들이 바로 대기업 부장들이다.
최근에는 네이버웹툰에서 연재 중인 웹툰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이하 김 부장 이야기)가 뇌리에 꽂힌다. ‘김 부장’이라는 꼰대스러운 대기업 부장 캐릭터가 주인공인데, 기업에 충성해왔던 직장인의 심리와 주변 환경을 현실감 있게 그렸다. 누구나 부러워할만한 대기업 부장의 ‘기승전결’이 드라마틱하게 묘사된다.
웹툰이 다소 과장하긴 했지만, 여전히 대기업들은 각각의 ‘라인’이 있고 소위 ‘줄을 타는’ 정치 행위가 만연하다. ‘김 부장 이야기’(1부 기준)에서 김 부장은 유일하게 자신의 상사이자 임원인 상무와 전무에게 안타까울 정도로 고개를 조아린다. 골프를 같이 치더라도 먼 곳에 있는 임원을 직접 자신의 차로 ‘모시러’ 가야하고 또 ‘모셔다 드려야’ 한다.
과거에는 대기업에서 부장 직급을 달고 퇴사하면 ‘갈 곳이 많다’고들 얘기했다. 하지만 현재 상황은 다르다. 대기업에서 나와 치킨집, 카페 등 자영업에 뛰어들거나 중소기업 임원으로 몇년 있다가 퇴사하는 경우도 빈번하다. 때문에 과거엔 임원을 바라보며 전력투구했던 대기업 부장들도 일찍이 노선을 ‘가늘고 길게’ 버티자는 전략으로 전환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
웹툰은 ‘대기업’ 타이틀을 뗀 ‘자연인’ 김 부장의 모습도 그렸다. 그는 퇴직 후 사기를 당해 공황장애에 걸렸고 상가 구입에 막대한 대출을 받아 정신 건강까지 피폐해진다. 정신과 상담까지 다닐 정도로 망가지는 김 부장의 퇴직 후 모습은 초반부 내용과는 상당히 대조적이어서 독자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준다.
지난해에도 내수 부진과 경기 위축으로 이름만 들어도 다 알만한 대기업 그룹들의 구조조정이 한창이다. 과거 IMF 외환위기 당시와 비할 바는 아니지만 현재 경제 상황도 못지 않게 암울하다. 대통령의 뜬금없는 비상계엄령 선포와 탄핵 정국으로 기업 환경은 더 안 좋아질 것이 자명하다. 때문에 올해에도 수많은 ‘김 부장’들이 사회에 나올 수밖에 없다. 상실감으로 찌든 김 부장들을 우리 사회와 제도가 어떤 식으로 감싸안아줄지 고민해야될 시점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