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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수연·김일구·윤진철, 국가무형문화재 판소리 보유자 인정
- 왼쪽부터 김수연, 김일구, 윤진철(사진=문화재청)[이데일리 김은비 기자] 문화재청은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수궁가)’ 보유자로 김수연(73) 씨를, ‘판소리(적벽가)’ 보유자로 김일구(81), 윤진철(56) 씨를 인정했다.김수연(수궁가), 김일구·윤진철(이상 적벽가) 씨는 판소리의 전승능력과 전승환경, 전수활동 기여도가 탁월한 점을 인정받아 무형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보유자로 인정됐다.판소리(수궁가) 보유자로 인정된 김수연 씨는 고(故) 김재경 명창, 고(故) 박초월 보유자(1917~1983), 고(故) 성우향 보유자(1935~2014)에게 판소리 수궁가, 심청가, 춘향가 등을 배웠으며, 2007년에는 판소리(춘향가) 전수교육조교가 되어 전승활동에 힘써 왔다. 판소리(적벽가) 보유자로 인정된 김일구 씨는 부친인 고(故) 김동문 명창, 고(故) 공대일 명창, 고(故) 박봉술 보유자(1922~1989)에게 소리를 배웠으며, 1992년에 판소리(적벽가) 전수교육조교가 되어 현재까지 왕성한 전승활동을 하고 있다. 특히, 김일구 씨는 지난 9월 판소리 심청가로 보유자가 된 김영자 씨의 남편이다.또 다른 판소리(적벽가) 보유자인 윤진철 씨는 고(故) 김홍남 선생, 고(故) 김소희 보유자(1917~1995), 고(故) 정권진 보유자(1927~1986)에게 적벽가, 심청가, 흥보가 등을 배웠으며, 보성소리 적벽가를 계승하여 많은 제자를 양성해왔다. 보성소리는 정응민 명창이 여러 스승으로부터 배운 서편제, 동편제 소리를 집대성하여 이룬 판소리 유파로, 전남 보성을 근거지로 전승되어 붙인 이름이다.문화재청 관계자는 “이번 ‘판소리(수궁가·적벽가)’ 보유자 인정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오랫동안 판소리의 계승에 전념해 온 전승자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전승 현장에 활력을 불어 넣어줄 것으로 기대된다”고 전했다.
- 韓 대표 불교 축제 연등회, 어떻게 세계유산 됐나
- 매년 음력 4월 8일 부처님오신날 열리는 연등회 모습(사진=문화재청)[이데일리 김은비 기자] 매년 음력 4월 8일 부처님오신날이 되면 전국 각지 사찰과 도시 곳곳에는 각양각색의 등이 거리를 장식한다. 서울 시내에만 5만여 개의 등이 불을 밝힌다. 거리에는 종교를 떠나 가족, 친구, 연인과 함께 직접 만든 연등을 들고 나온 사람들이 행렬을 만들어 걷는다. 신기한 동양의 문화는 외국인 관광객에도 관심거리다. 이렇게 모인 사람들만 매년 30만명이 넘는다. 한국의 대표 불교행사 연등회(국가무형문화재 제122호)가 지난 16일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면서 화제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연등회가 시대를 지나며 바뀌어 포용성으로 경계를 넘어 문화적 다양성을 보여주는 점, 사회적 경계를 일시적으로 허물고 기쁨을 나누고 위기를 극복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는 점” 등을 높이 평가했다.불교 행사인 연등회는 어떻게 오늘날 세계인들이 즐기는 축제로 발전할 수 있었던 걸까. 전문가들은 화합, 배려 등 불교의 핵심적 메시지 덕분이라고 입을 모은다. 박상미 문화재위원회 세계유산분과 위원은 “형형색색의 등을 든 수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는 화려한 축제지만 운영에 있어 절제와 약자를 위한 배려가 보인다”고 설명했다. 박상희 연등보존위원회 전문위원은 “연등회에서는 모두가 공동체로 함께하며 하하호호 웃는 것을 최우선의 목표로 한다”며 “이것이 곧 불교의 기본 정신이고 우리 사회가 추구하는 방향”이라고 했다.연등회는 통일신라 때 처음 시작해 1000년 넘게 이어져 오고 있다. 특히 불교 국가였던 고려시대에 연등회는 국가적 행사로 자리잡았다. 고려 태조가 남긴 ‘훈요십조’에 따르면 음력 정월 보름과 2월 보름에 국왕과 온 백성이 풍년을 기원하며 궁궐부터 시골까지 화려한 연등을 밝히고 잔치를 열고 가무를 즐겼다. 왕이 행차했다 돌아오는 가두행진의 길 양 옆에는 이틀밤에 걸쳐 3만개의 등불을 밝혀 불빛이 낮과 같이 밝았다고 할 정도로 성행했다.이때는 어른뿐 아니라 아이들도 연등회를 즐겼던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호기 놀이’가 유행했는데 아이들은 연등회를 앞두고 종이를 오려 장대에 붙여 깃발을 만들고 물고기 껍질을 벗겨 북을 만든 뒤, 깃발을 앞세우고 북을 두드리면서 마을과 거리를 몰려다니며 연등 비용을 보태달라고 외쳤다. 이렇게 쌀과 베를 얻어다가 연등회 비용으로 썼다. 박상희 전문위원은 “한국판 핼러윈인 셈”이라고 말했다.조선시대 숭유억불정책으로 국가가 주관하는 연등회는 중지됐지만 규모가 줄진 않았다. 민간에서는 민속행사로 남아 세시풍속으로 전승됐다. 집집마다 장대를 높이 세우고 자녀의 수대로 등을 밝혔고, 거리 곳곳에 형형색색의 등을 달았다.현대에서 연등회는 1955년부터 다시 시작됐다. 초창기에는 서울 종로구에 있는 조계사를 중심으로 연등을 든 행렬이 걷는 수준이었다. 해를 거듭할수록 대학생, 직장인 등 자발적 연등회 참여인원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1975년 부처님오신날이 공휴일로 지정되면서 더욱 참가자가 늘어났다. 다양한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행사를 고민하면서 연등행렬을 비롯해 불교문화마당, 어울림마당, 회향한마당 등 다양한 행사가 추가됐다. 박상희 전문위원은 “연등회가 이제는 봄철 대표적 축제로 자리잡았다”며 “어떤 사람들은 6개월 전부터 연등회를 준비한다고 들었다”며 웃었다. 그는 “연등회는 크고 화려하기보단 누구나 편안하게 와서 참여하고 즐길 수 있는 축제가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 연등회,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 등재되나
- 연등행렬 주악비천 장엄등행렬(사진=문화채정)[이데일리 김은비 기자] 한국의 대표 불교행사인 연등회(국가무형문화재 제122호)의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 등재 여부가 오늘(16일) 저녁 판가름난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이날 프랑스 파리에서 온라인으로 열리는 제15차 유네스코 무형유산보호 정부간위원회(무형유산위원회)에서 연등회의 유네스코 등재 여부가 최종 확정된다. 앞서 지난달 17일 무형유산위원회 산하 평가기구는 연등회에 대해 ‘등재권고’ 결정을 내렸다.평가 기구 심사 결과는 등재, 정보 보완, 등재 불가 등 3개 등급으로 나눠 무형유산 위원회에 권고한다. 큰 이변이 없는 한 대체로 평가기구의 판결을 받아들인다. 우리 정부는 연등회를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에 등재하기 위해 지난 2018년 3월 등재신청서를 제출했다. 지난해 등재신청서 양식 변경에 따라 수정신청서를 제출한 바 있다.연등회는 부처님의 탄생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불교 행사로, 진리의 빛으로 세상을 비춰 차별없고 풍요로운 세상을 기원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연등회는 551년(진흥왕 12) 신라에서 팔관회의 개설과 함께 국가적인 행사로 열렸고 고려 때 특히 성행했다.연등회는 불교행사로 시작했지만, 1975년 부처님오신날이 국가 공휴일로 지정되면서 종교·나이·성별과 관계없이 누구나 참여하는 축제로 발전했다. 한국은 연등회 등재시 총 21건의 인류무형유산을 보유하게 된다.2001년 종묘제례 및 종묘제례악이 처음 등재된 이래 △강릉 단오제(2005년) △강강술래, 남사당놀이, 영산재, 제주칠머리당영등굿, 처용무(이상 2009년) △가곡, 대목장, 매사냥(2010), 택견, 줄타기, 한산모시짜기(이상 2011년) △아리랑(2012년) △김장문화(2013년) △농악(2014년) △줄다리기(2015년) △제주해녀문화(2016년) △씨름(2018년)이 인류무형유산에 이름을 올렸다.
- 거칠고 황량한 '세한도'가 당대 최고 문인화인 이유는?
- [이데일리 김은비 기자] “‘세한도’는 당대 최고 문인인 추사 김정희(1786~1856)가 온 정성을 다해 그린 그림이다. 그림 속 나무, 집, 여백이 상징하는 바와 그림을 그렸던 배경까지 여러 면을 볼 수 있어야 작품의 진정한 가치를 알 수 있다.”추사 김정희 연구의 권위자인 최완수 간송미술관 한국민족미술연구소장은 김정희의 대표적 문인화인 국보 제180호 ‘세한도’가 왜 대단한 작품인지에 대해서 이같이 설명했다.최근 미술품 소장가 손창근 선생이 아버지 대부터 소장하고 있던 ‘세한도’를 아무 조건 없이 국가에 기증해 화제를 모았다. ‘세한도’는 김정희가 1844년 제주도 귀양살이 시절, 변함없이 사제간의 의리를 지킨 제자 이상적에게 고마움을 전하기 위해 그린 그림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지난달부터 특별전 ‘한겨울 지나 봄 오듯-세한·평안’을 개최하고 ‘세한도’를 국민에 공개했다. 하지만 ‘세한도’의 명성만 듣고 작품을 접한 사람들은 얼핏 왜 그렇게 높은 평가를 받는지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제자에 대한 고마움을 담았다고 했지만 그림은 온화하고 정성스럽다기보단 거칠고 단출한 느낌이기 때문이다. 가로 69.2cm, 세로 23cm 크기의 종이 한가운데 어설픈 집 한 채와 소나무, 잣나무 몇 그루만 그려져 있다. 메마른 붓에 빡빡한 먹을 묻혀 종이에 문지르듯 그린 그림은 황량하다는 느낌마저 든다.전문가들은 ‘세한도’의 진면모를 알기 위해선 추사의 삶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는 추사의 삶을 정리한 영상 ‘김정희의 삶과 예술’을 국립중앙박물관 유튜브에 올리기도 했다.(그래픽= 문승용 기자)◇서예·예술에 ‘천재성’ 보인 명문가 자제김정희는 1786년 대단한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추사의 고조할아버지는 영의정을 지냈고 증조할아버지 김한신은 영조의 사위였다. 아버지 김노경은 이조판서를 지냈다. 이렇듯 든든한 가문의 배경에 더해 김정희는 어릴 적부터 글씨와 그림 그리기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정조 때 정승을 지낸 채제공은 김정희가 7살 때 쓴 ‘입춘대길’이라는 글씨는 보고 “이 아이는 반드시 명필로 이름을 떨칠 것”이라고 말했을 정도였다.이듬해에는 북학파의 박제가가 김정희가 쓴 ‘입춘대길’을 보고 “이 아이를 키워 가르치고 싶다”고 말했다. 박제가의 제자가 된 김정희는 그를 통해 당시 청나라에서 유행한 고증학과 금석학(비석에 새겨진 글을 바탕으로 언어를 연구함)을 배울 수 있었다. 유 교수는 “이때부터 김정희는 기회가 된다면 스승처럼 북경에 가야겠다는 꿈을 키웠다”고 설명했다.23살이 된 김정희는 아버지가 청나라 사신으로 가면서 함께 중국 연경으로 가게 됐다. 수행원 자격으로 따라갔던 김정희는 자유롭게 중국의 다양한 학문을 접할 수 있었다. 또 완원, 옹방강 등 중국 당대 최고의 학자들과 교류하며 자신의 가능성을 한껏 키울 수 있었다. 금석학을 발전시킨 대표적 인물이었던 두 사람은 김정희의 글씨에 한눈에 매료됐다. 이때부터 김정희의 개성적 서체인 ‘추사체’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추사체는 중국과 우리나라의 옛 글씨체를 연구해 만든 새로운 글씨체로 김정희는 평생 추사체를 발전시켰다.김정희는 이처럼 뛰어난 능력을 바탕으로 34세에 장원 급제했다. 가문의 권세로 조정에서 급제를 축하할 정도였고 이후에도 명성을 날렸다. 규장각에서 대교를 지낸 그는 성균관 대사성, 형조참판 등을 지냈다.김정희가 당대 위대한 예술가이자 학자였다는 사실은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졸기(망자에 대한 세간의 평가를 기록)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대단한 역사적 인물에 대해서만 사망 기록이 남겨져 있다. 마지막 관직이 병조참판이었던 김정희는 지위 자체만 보면 실록에 기록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철종 7년 10월 10일 기록에는 ‘(김정희는) 이조판서 김노경의 아들로 총명하고 기억력이 투철해 여러 가지 책을 널리 읽었으며, 금석문과 그림과 역사에 깊이 통달했고, 초서 해서 전서 예서에서 참다운 경지를 신기하게 깨달았다’는 내용이 있다.세한도 늙은 소나무 뿌리 부분(사진=국립중앙박물관)◇척박한 제주도 귀양생활 중 완성한 ‘세한도’하지만 김정희는 가문이 힘을 잃기 시작하면서 완전히 바뀐 삶을 살았다. 김정희는 55세 때 정적의 모함으로 아버지를 잃고 자신도 고문을 받아 만신창이가 됐다. 김정희 역시 사형에 처해질 뻔했으나 그보단 아래인 위리안치형을 받아 제주도로 귀양을 갔다. 특히 김정희가 8년간 귀양생활을 한 대정현은 제주도에서도 바람이 사납고 땅이 척박해 사람이 살기 힘든 곳이었다. 이곳에서 김정희는 울타리 밖도 벗어날 수 없었다. 유 교수는 “다른 사람과 접촉할 수 없었던 추사는 그 어떤 때보다 자신과의 대화를 많이 했고 ‘세한도’, ‘추사체’ 등을 이 시기에 완성했다”고 설명했다.‘세한도’에서는 당시 김정희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오다연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추위를 그림으로 그리기가 쉽지 않아 일반적으로 눈이나 메마른 나무를 통해 표현을 한다”며 “하지만 김정희는 가장 거친 종이 위에 마른 붓과 진한 먹을 사용해 한겨울 매서운 추위를 누구보다 멋있게 그렸다”고 말했다. 또 푸른 소나무와 촉백나무는 논어의 구절을, 창문 하나밖에 없는 집은 김정희의 귀양생활을 드러낸다. 화면 좌측에 김정희가 정성스럽게 쓴 제작 사유도 깊이를 더한다. 오 학예연구사는 “조선시대에 이렇게 상세히 그림의 제목과 제작 사유를 쓴 작품은 드물다”고 부연했다. 여기에 청나라 문인 16명이 쓴 극찬은 ‘세한도’를 더욱 빛낸다. 최 소장은 “추사가 당대 최고의 문인이었기에 이같이 함축적인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또 이를 알아봐 준 추사의 중국 동료 학자들이 있었기에 ‘세한도’가 완성될 수 있었다”고 부연했다. 국보 제180호 세한도(사진=국립중앙박물관)◇중국 2000년 서예사 아우르는 ‘추사체’귀양생활 중 김정희의 ‘추사체’도 완성된다. 유 교수는 “이때 당시의 추사체를 보면 괴이하다고도 말할 수 있지만 추사체의 변천 과정을 보면 중국 명필의 고전에서부터 오랜 연구를 통해 창의성을 발현한 것을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유 교수는 박규수가 쓴 ‘추사체 변천론’을 인용해 그 과정을 설명했다. 이에 따르면 ‘추사의 글씨는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여러 차례 바뀌었다. 청년시절에는 글씨의 획이 너무 두껍고 골기가 적었다는 흠이 있었다. …그러다 만년의 귀양살이 이후에는 드디어 남에게 구속받고 스스로 일법을 이루게 됐으니 신이 오는 듯 기가 오는 듯, 바다의 조수가 밀려오는 듯했다’고 돼 있다.유 교수는 “이렇듯 김정희의 추사체는 중국 서예 2000년 역사를 아우르고 있다”며 “추사는 조선시대 서예사뿐 아니라 동양 서예사 전체에서 견줘도 위상이 뒤처지지 않는다”고 평했다.김정희 초상(사진=국립중앙박물관)